[홍재민의 축구話] '보스'가 되지 못한 전술가 빌라스-보아스
입력 : 2012.03.0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기사 첨부이미지
[스포탈코리아] 축구 팀을 이끄는 사람을 우리는 ‘감독’이라고 부른다. 미국 스포츠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이를 ‘헤드 코치(Head Coach)’라고 바꾸지만 영국에서는 ‘매니저(Manager)’가 일반적 표현이다. ‘Manager’를 다시 한글로 옮기면 ‘경영자’ 또는 ‘책임자’가 된다.

4일 밤 첼시에선 익숙한 소식이 들려왔다. 감독을 내쫓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신동’ 감독은 불과 한 시즌도 채우지 못한 채 프리미어리그를 떠나게 되었다. 구단 발전 3개년 계획은 역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겐 지나치게 길었다. 236억원의 FC포르투 보상금, 3년간 보장한 239억원 연봉 총액을 지불하기로 한 7개월 전 결정을 간단히 뒤집었다.

영국 축구계와 팬 심지어 국내 프리미어리그 팬들까지 아브라모치비의 폭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고 눈앞의 성적에만 매달려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의 목을 쳤다는 것이다. 공감 가는 의견이다. 2003년 첼시를 인수한 아브라모비치는 지금까지 9년간 7명의 감독을 고용했다. 26년째 한 명뿐인 라이벌 구단에 비해 너무 잔인하고 성급해 보인다.

그러나 내년 UEFA챔피언스리그 출전권 확보를 위해선 부득이한 선택일 수도 있다. 지난 시즌 첼시는 UEFA챔피언스리그 대회에서만 787억원을 벌었다. 홈경기 입장수입은 제외된 숫자다. 빌라스-보아스 해고비용과 내년 UEFA챔피언스리그 대회 예상수입을 저울질하면 그림은 뚜렷해진다. 카를로 안첼로티를 해고한 결정은 비난 받을 구석이 크지만 빌라스-보아스의 처리는 솔직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미어리그 빅클럽에 UEFA챔피언스리그 출전은 현상 유지를 위한 마지노선이다. 리그 4위권 진입을 위한 최선책이 감독 해임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감독 경질은 선수단 분위기를 일신하는 충격요법이다. 장기적 팀빌딩을 저해하지만 지금 당장 목이 마른 사람에겐 오아시스와 같다. 첼시는 지금 무척 목이 마른 상태다. 아브라모비치가 아니라 프리미어리그의 시장경쟁 자체가 잔인한 것이다.

어쨌든 빌라스-보아스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전술적으론 치밀했지만 선수단 통솔에 문제를 드러냈다. 전술 하나만 놓고 따진다면 빌라스-보아스는 알렉스 퍼거슨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분석하고 데이터 가공 및 응용에 익숙했다. 종이 위를 빼곡히 채운 숫자와 메모가 그대로 실제 경기 위에서 구현된다면 아마도 빌라스-보아스는 퍼거슨보다 훨씬 위대한 명장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알다시피 퍼거슨은 하프타임 때 위스키를 마시고 경기 후에 시가를 피우던 시절 축구를 배웠던 인물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선 퍼거슨이 승자, 빌라스-보아스가 패자다. 빌라스-보아스의 경영수완이 첼시라는 조직에선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영자의 능력과 회사 실적은 강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구멍가게부터 세계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무능력한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경영자에게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보다 ‘사람 잘 쓰는’ 능력이 더 요구된다. 이건희 회장을 스마트폰 제조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을 잘 만들고 잘 파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쓴다’. 맨유의 성공신화가 퍼거슨이 스타플레이어 출신 덕분이었을까? 퍼거슨 ‘선수’의 활약상은 자서전 외에는 딱히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는 현존 최고의 명장이다. 유럽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했고, 프리미어리그를 무려 열두 번 제패했다. 잘 차고 잘 뛰고 잘 막는 스타플레이어들을 ‘잘 썼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부터 첼시에서는 이상징후가 감지되었다. 빌라스-보아스와 팀 내 주전급 선수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직관리의 첫 번째 단계부터 장애가 발생한 셈이다. 빌라스-보아스의 출신 배경이 치명타일 수도 있다. 어린 나이를 떠나 그는 몇 해 전까지 첼시의 전력분석관이었다. 머리가 굵은 선수들로선 그런 인물을 감독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빌라스-보아스는 과학적 근거에 따른 세대교체에 앞서 우선 팀 내에서 권력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규명했어야 한다. 선수들에게 누가 이끌고 누가 따를지를 확실히 알렸어야 했다. 아쉽게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압신 고트비 전 이란 대표팀 감독에 대한 박지성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고트비는 2002년 거스 히딩크 사단에서 비디오분석관으로 활약했다. 이후 고트비는 이란 대표팀의 정식 감독까지 올랐다. 하지만 고트비에 대해서 묻자 박지성은 “그 사람 코치 아니었는데…”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축구팀 내에서 감독, 코치 그리고 일반 스태프에 따라 축구 선수들의 대인관계 정립 기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잘 보여주는 일례였다. 빌라스-보아스를 바라보는 첼시의 리더급 선수들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축구 클럽에서의 감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직접 축구를 잘할 필요는 없다. 축구를 직접 하는 선수들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린 문제다.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 감독은 ‘매니저’라는 공식 명칭 외에 ‘Boss’, ‘Gaffer’ 등의 속칭으로 불린다. 감독을 ‘스승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한국과는 정서가 다르다. 선수들에게 있어서 감독은 자신의 인사권을 쥔 직장 상사이고, 두목이고, 대장이다. 축구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부리는 사람이다.

실제로 영국 구단의 훈련 모습을 구경하면 감독은 정말 편해 보인다. 훈련 내내 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직접 나서 선수들을 진두지휘하는 감독은 드물다. 훈련 메뉴의 수립 및 실천은 어디까지나 코치의 몫이다. 감독은 코치와 선수들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써먹을 궁리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일이 조직의 성공적 관리를 위해선 가장 중요하다. 무리뉴는 그걸 가졌지만 빌라스-보아스는 드센 영국 축구 선수들을 다루는 요령을 아직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늘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