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어든이 꼽은 ‘세계가 주목한 귀환’…안정환은 2위
입력 : 2012.02.2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때로는 의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축구계에서는 친정 팀으로의 귀환이 처음만큼 좋은 경우는 드물다. 그게 인생이다. 축구계에서 친정 팀으로 복귀한 선수들 10명을 모아봤다. 이들이 모두 성공을 거뒀다기 보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경우라 하겠다. 순위는 듀어든이 마음대로 꼽은 순위이니 지나친 비판은 삼가하자!

1. 요한 크루이프 (아약스 1964~1973, 1981~1983
크루이프와 아약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고작 10살에 아약스에 입단했고, 7년 뒤에 1군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고는 곧 팀의 전설이 됐다. 70년대 초 아약스가 유러피언컵을 세 번 연속 차지하는 배경에는 크루이프가 있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1973년에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입단했고 거기서도 전설이 됐다.

크루이프는 1981년 12월에 아약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아약스가 1982년과 1983년에 리그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아약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이 거장에게 감사함 따위는 가지지 않은 듯 했다. 아약스는 크루이프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크루이프는 “아약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너무 나이가 많아요.’ 다른 사람에게는 이 말이 뭔가를 결정할 이유가 되지 않겠지만, 나는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 크루이프는 그다운 행동을 했다. 아약스의 천적인 페예노르트에 입단해 1984년 리그 우승과 컵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2. 안정환 (부산 1998~2000, 2008)
안정환은 아시아 최고의 축구 스타 중 한 명이다. 90년대 부산에서 그는 중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선수였다. 그렇다. 안정환은 부산에 그리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지만, 부산 축구 역사에서 최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구덕운동장 시절에 최고의 스타가 됐다. 부산을 떠난 그는 세계 축구 여행을 시작했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하지만 8년 후 친정 팀으로 되돌아왔다. 예전처럼 파괴력 있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잠시 동안 부산 팬들은 꿈을 꿀 수 있었고, 안정환의 귀환을 보고 행복해 했다.

3. 지쿠 (플라멩구 1971~1983, 1985~1989)
지쿠가 떠나 있었던 시간은 단지 2년이었지만 플라멩구 팬들에게는 영원의 시간 같았다. 지쿠는 12살 적에 클럽에 입단했고,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됐다. 1982년 월드컵에서 지쿠는 스타가 됐다. 1년 후 그는 계약 연장을 거절하고 이탈리아 우디네세로 향해 충격을 던졌다.

지쿠는 첫 번째 시즌에는 환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우디네세 회장과 사이가 나빠졌고, 런던 소재 한 회사에게 지쿠 자신의 이름과 초상권을 팔아 넘긴 후 “이탈리아 밖에서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한다는 이유로” 이탈리아를 떠나야만 했다.


플라멩구에 다시 돌아와서 지쿠는 잇단 부상으로 고생했고, 더 이상 그는 예전의 지쿠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쿠였다. 1986년 팀을 리오 주 챔피언으로 올려놨다.

4. 폴 스콜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4~2011, 2012~ )
끝이 없고 상시적인 축구 미디어 관심 속에서 비밀이란 없다. 하지만 1월 FA컵 맨체스터 더비 직전에 지난 시즌으로 은퇴한 스콜스가 복귀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언론과 팬들은 스콜스가 교체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복귀 후 첫 번째 경기에서 스콜스는 골을 기록했다. 대단한 복귀는 아니었지만 그는 점차 나아졌고, 현재는 맨유 최고 선수들 중 한 명처럼 보인다.

5. 마토 네레틀랴크 (수원 2005~2008, 2010~2012)
2005년 수원에 입단할 때 마토는 크로아티아에서 온 무명의 선수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그는 탁월한 리더십, 대단한 수비 능력, 다른 어떤 수비수보다 나은 골 감각을 지녔다. 이 모든 것은 수원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구가하는데 크게 한 몫 했다.

그가 2008년을 끝으로 J리그로 떠났을 때 모두가 슬퍼했다. 그는 오미야 아르디자에서 두 시즌을 보내며 꽤 좋은 활약을 펼쳤고, 클럽의 중요한 선수가 됐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빅버드인 것 같았고 결국 돌아왔다.

K리그 팬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외국인 선수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토는 일본으로 떠난 후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다시 한 번 K리그 선수가 돼서는 이전만큼 괜찮은 모습을 결코 보여주지 못했지만 여전히 좋은 활약을 펼쳤다.



6. 디에고 마라도나 (보카 주니어스 1981~1982, 1995~1997)
마라도나는 아마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일 것이다. 그의 명성은 보카 주니어스에서 시작됐다. 비록 보카가 그의 친정 팀은 아니지만 말이다. 마라도나는 1981년에 막대한 돈을 받고 보카 주니어스에 입단했다. 몇 달 후 엄청난 골을 기록하며 보카 주니어스를 우승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 하지만 보카가 더 이상 막대한 돈을 지급할 여력이 없게 되자 문제가 생겼고, 1982 월드컵 후 마라도나는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이따금 보카는 마라도나가 돌아오기를 원했으나 그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할 여력이 없었다. 모든 것은 1995년에 급변했다. 물론 그 당시 마라도나는 전성기를 이미 훌쩍 지난 상태였다. 그는 클럽에서 무상 보조 코치였고, 후에는 선수가 됐다. 성과가 썩 좋지는 못했다. 마라도나는 클럽을 떠난 마약 중단 치료를 받았다. 그는 후에 클럽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클럽이 나이키의 스폰서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미국을 싫어했다. 마라도는 개인 트레이너로 벤 존슨을 고용하기도 했다.

7. 나카무라 슌스케 (요코하마 마리노스 1997~2002, 2010~ )
나카무라 슌스케는 고향팀에서 이름을 리고 12살 때 클럽에 입단했다. 요코하마에서 그는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1군에서 뛴 지 5년이 지나자 그는 일본국가대표팀 선수가 됐지만 2002 한일월드컵에는 뛰지 못했다. 그는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스페인에서 뛰었고 다양한 수준의 성공을 거뒀다.

8. 티에리 앙리 (아스널 19992007, 2012)
아스널에서 앙리의 활약은 너무나 대단해서 클럽은 경기장 밖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그는 아스널에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뛰며 254경기에서 174골을 넣었다. 그가 유벤투스와 다툼 끝에 아스널에 왔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아르센 벵거 감독 하에서 앙리는 스타가 됐다.

지난해 말 어느 누구도 앙리가 아스널에 복귀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뛴 다음, 뉴욕 레드 불스로 갔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고 마치 운명처럼 복귀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다. 선덜랜드전에서 막판 결승골이었다.

9. 글렌 호들 (토튼넘 1975~1987, 2001~2003)
맞다. 글렌 호들은 선수로서 결코 되돌아 온 적이 없다. 감독으로서 귀환했다. 호들은 80년대 토트넘을 상징했다. 그는 깜짝 놀랄만한 기술을 가진 환상적인 선수였다. 토트넘 팬들은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 분위기에서 일부 영국 감독들은 그가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잉글랜드에서 뛰기에는 거칠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가 해야만 하는 플레이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2001년, 글렌 호들은 토트넘 지휘봉을 넘겨 받았다. 출발은 좋았는데, 리그 컵 결승전에서 블랙번에게 패배했고, 2003 시즌 초반을 형편없이 보내자 해고됐다.

10. 로타르 마테우스 (바이에른 뮌헨 1984~1988, 1992~2000)
마테우스는 위대한 미드필더였고,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선수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그는 4년 동안 세 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1987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섰다. 인터 밀란에서 뛰는 독일 출신의 선수가 됐고, 독일을 1990년 월드컵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에 올해의 월드 플레이어로 선정됐다.

마테우스는 1992년 독일로 돌아와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을 네 번 더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는 2000년에 마지막 경기에 나섰다. 홈 경기였는데,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레알 마드리드를 4-1로 제압하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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