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의 축구환상곡] ‘위대한 패장’ 무리뉴, “초인은 영화에만 존재한다”
입력 : 2012.04.26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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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한준 기자= 하얗게 새어버린 삭발 머리, 무릎까지 꿇고 바란 주제 무리뉴의 간절한 기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의 통산 10번째 유럽 챔피언 등극이라는 ‘미션’을 부여 받은 ‘스페셜 원’은 두 번째 시즌에도 준결승전에서 좌초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큰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이 ‘아주 조금’ 필요한 법이다. 5년 전 첼시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팀으로 만들고도 준결승전에서 탈락하던 무리뉴의 잔영이 떠올랐다. 항상 최고의 팀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무리뉴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번에도 승부차기였다. 세르히오 라모스의 슈팅이 하늘로 솟구치며 축구의 신은 무리뉴의 손을 놓아버렸다.

▲ 차가운 도시 감독 무리뉴, 내 팀에게만은 따뜻해

레알 마드리드가 안방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티켓을 내준 25일 밤(현지시간), 무리뉴는 “나는 괜찮다. 이것이 축구다”라며 담담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장에 등장했다. 앞서 결승 진출을 이룬 바이에른 선수단의 탈의실을 방문해 신사적인 축하를 건넨 온 뒤였다. 바이에른 감독 유프 하인케스의 말대로 그는 “품격 있는” 남자였다.

비록 패배했지만 무리뉴의 축구는 그의 탁월한 품성만큼이나 위대했다. 바이에른과의 2연전과 바르셀로나와의 엘클라시코 더비 원정 경기를 치른 운명의 일주일, 무리뉴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축구를 했다. 내용과 결과, 기량과 정신력 모두 최고의 수준이었다. 3차례 경기에서 2승을 거뒀다. 하지만 결승 진출은 무리뉴의 몫이 아니었다.

FC 포르투를 이끌고 유럽 챔피언에 등극했던 무리뉴는 역시 ‘챔피언스리그의 사나이’였다. 무리뉴는 지난 8년 동안 4개의 팀을 이끌고 6차례나 준결승에 올랐다. 그 중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트레블도 달성했다. 무리뉴는 축구계에서 더 이상 검증할 것이 없는 감독이다. 그는 3대리그 정복과 3차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불멸의 금자탑에 도전하고 있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 엘클라시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사 모두에게 독이 됐다

레알 마드리드에게 부족했던 것은 ‘체력’이었다. 바이에른과의 2연전 사이에 끼어있던 바르셀로나와의 엘클라시코 더비 일정은 끝내 부담이 됐다. 무리뉴는 허무했던 승부차기의 이유, 그리고 바이에른을 압도하지 못했던 이유를 강행군 일정에서 찾았다.

“우린 승리할 자격이 있었다. 두 경기 모두 팽팽했다. 한 팀은 리그 우승을 위해 싸우고 있었고 다른 팀은 리그 우승에 좌절됐다는 점이 차이였다. 첼시 감독 시절 리버풀에게 패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들은 풀럼전에 2군을 내보냈고 우리는 1군을 모두 써야했다. 결국 우리는 체력적으로 열세를 보였다.”

무리뉴 감독은 일정 조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스페인 축구계는 사상 첫 결승전 엘클라시코 더비 성사 가능성에 열광했지만 그를 위한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그저 일정을 하루 앞당겨 2차전 대비 시간을 조금 남겨줬을 뿐이다. 유럽 축구의 1년 일정은 8월에 결정된다. 스페인리그연맹은 엘클라시코의 일정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었다. 리그 랭킹을 좌우할 유럽대항전에서 소속리그 팀을 배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이에른과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앞뒀던 마르세유의 경우 프랑스리그연맹에서 경기 일정을 아예 연기 시켜주기도 했다. 이탈리아 축구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잉글랜드 5위 팀과 독일 2위 팀이 결승전에 올랐다.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올 시즌 가장 중요한 경기를 치르는 동안 두 팀은 2군을 내보냈다. 이탈리아에서는 일정을 조절해달라고 부탁하면 내겐 행복할 결과를 만들어 줬다. 이곳 스페인에서는 그런 존중이 없다. 난 영향력도 없고 내 의견은 어떤 효력도 없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같은 일이 생겼다. 바이에른이 승리했고 우리보다 운이 더 좋았다.”

하지만 무리뉴 감독은 패배를 전적으로 일정의 문제로 돌리지 않았다. 그는 “결국 우리의 잘못이다. 다른 팀을 상대로 더 승점을 얻었다면 앞선 경기에 다른 선수들을 내보낼 수 있었다”며 최근 라리가 경기에서 승점을 잃었던 것을 자책했다. 하지만 선수들에 대한 질책은 없었다. “나의 선수들은 환상적이었다. 2-1이 되자 굉장히 어려웠다. 두 팀 모두 중대한 실수를 범할까 두려워하며 경기를 했다. 높은 압박에 경기가 처졌다.”



▲ 승부차기, 용감한 이들만이 시도할 수 있는 러시안룰렛

무리뉴 감독은 승부차기 실축에 대한 비난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축구계 최고의 입담꾼이자 독설가답게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의 철학을 녹여냈고, 누구나 납득할 수밖에 없는 설명을 전했다. 쉽게 말하고 쉽게 판단하며 쉽게 지탄하는 이들을 향해 날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선수들을 보호했다.

“두 시간 동안 한계치까지 뛰고 난 뒤에 페널티킥으로 득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키커로 나선 선수들은 용감한 이들이다.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최고의 선수들도 실패할 수 있다. 축구란 그런 것이고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크리스티아누는 경기 최고의 선수였다. 초인은 영화에나 있는 것이다.”

인생은 맞춰진 각본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완벽해보이는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고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다. 인생사는 그렇게 운명처럼 느껴지는 우연의 연속이다. 그래서 누구나 뜻 밖의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예기치 못한 패배를 당할 수 있다.

“이 수준에 있는 최고의 선수들도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왜 놓쳤다고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2층에 살면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이들이다. 그러면서 왜 엘리베이터가 없냐고 불평하는 이들이다. 우리 선수들은 엄청난 압박 속에 동물처럼 뛰어다녔다. 두 팀은 모두 5개의 페널티킥을 넣지 못했다. 페널티킥은 시도한 사람만이 실축도 할 수 있는 것다. 난 차지 않았기 때문에 실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패한 선수들은 모두 용감했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이타적인 이들이다. 난 이 선수들이 아주 자랑스럽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 독이 찬 무리뉴의 비판은 언제나 그런 이들을 향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을 대하는 무리뉴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신사적이다. 무리뉴는 냉정한 축구를 하지만 낭만적인 사람이다. 냉철하게 경기를 준비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축구를 한다. 모래알 스타군단으로 불리던 레알 마드리드가 그라운드 위의 리더십 없이도 하나의 단단한 팀으로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리뉴의 존재 때문이다.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오히려 이번 시즌 유럽 챔피언이 되지 못한 것이 반가울 수도 있다. 무리뉴가 올 시즌 더블을 달성할 경우 모든 목표를 이루게 된다. 두 대회를 우승하면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해야할 미션이 남았고, “팀은 성장하고 있다. 클럽과 선수들이 원한다면 계속할 것”이라며 다음 시즌에도 팀에 남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표명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1월 코파 델레이 8강전에서 탈락하며 타이틀 방에어 실패한 레알 마드리드에게 남은 것은 리그 우승 타이틀이다. 3년 간 FC 바르셀로나에 내준 스페인의 왕좌다. 4차례 리그 경기가 남았다. 우승이 유력하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다. 무리뉴 감독은 팀 분위기를 최대한 선수단의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한 최선의 코멘트를 던졌다. 기자회견장에서의 한 마디 한 마디도 팀 빌딩의 일부로 삼는 무리뉴다운 모습이다. 이미 다음 시즌을 위한 발걸음이 시작됐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선수들 때문에 슬프다. 우리 선수들이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압박감을 느낀다. 리그 우승만 이뤄도 좋은 시즌이 될 것이다. 선수들은 그동안 잘 훈련해왔다. 두 시즌 연속 4강에 오른 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원한다. 다음 시즌에 우리는 또 다시 이 자리에 있을 것이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해 싸울 것이다.”



▲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패장, 무리뉴의 꿈은 계속된다

‘별들의 전쟁’은 최고의 별들이 이탈한 채 마지막 경기를 남겨뒀다. 물론, 최고의 별을 추락시킨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무리뉴는 일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승자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았다.

“2년 전에는 내가 기쁨을 누렸다. 이번에는 바이에른의 차례다. 첼시는 내 인생의 팀 중 하나다. 그들이 이기길 바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바이에른에게도 좋은 결승전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축구의 아름다움이다. 첼시는 영웅 같은 경기를 했다. 2년 전 인테르의 경기에 가해진 비판이 첼시에게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 10명의 선수들이 경기 내내 수비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난 누가 영웅인지 알고 있다. 첼시는 자격이 있고 바이에른도 그렇다. 이제 그들에게 환상적인 기회가 왔다.”

무리뉴는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패장 인터뷰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무리뉴는 패배 속에도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이 승부차기를 놓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을 위로하며 전한 말처럼 “시련이 더욱 큰 성장을 부른다”. 첼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지만 인터 밀란에서 트레블을 달성했던 무리뉴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제 무리뉴는 라리가 타이틀을 확실하게 거머쥐기 위한 남은 4경기를 준비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올시즌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그의 뒷모습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글=한준 기자
사진=MBC 스포츠 플러스 중계화면 및 ⓒBPI/스포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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