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의 축구話] 판 페르시와 아스널의 '밀당' 대해부
입력 : 2012.04.24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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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육지로 돌아가는 마지막 배가 끊기기 일보 직전 남녀 커플의 마음. 아마도 크게 다를 것이다. 후반전 추가시간도 앞선 팀에는 몇 년처럼, 뒤진 팀에는 찰나처럼 느껴진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처럼 합리적인 동시에 무책임한 말도 없다.

아스널과 로빈 판페르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머리말에서 알 수 있듯이 둘의 마음은 지금 천지차이다. 판페르시는 지금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 트로피 앞에서 ‘섹시한’ 미소를 뽐내면서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다. 아스널도 “판페르시야말로 아스널의 자랑”이라며 폼을 잡고 있긴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다르다. 판페르시란 개인이 부각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아스널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하다.

아스널과 판페르시의 현 고용계약은 2013년 7월까지다. 계약이 만료되면 판페르시는 ‘당연히’ 자유계약신분이 된다. 따라서 아스널로서는 그 전에 판페르시와의 계약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실제로 올 시즌 내내 아스널은 그렇게 노력해왔다. 하지만 급할 것 없는 판페르시 측에서 “재계약 협상은 시즌 종료 후”라며 테이블에 앉지도 않았다. 자, 슬슬 시즌이 끝나가니 우리 협상 준비하자꾸나, 로빈. 아쉽게도 판페르시는 시즌 종료 나흘 뒤인 17일에 오렌지군단의 유로2012 캠프에 합류할 예정이다. 아스널은 유로2012가 종료되는 7월초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떡 하니 버틴 유로2012가 아스널에는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스널이 판페르시를 잡아야 할 이유는 중언부언 필요 없이 명명백백하다. 팀 내 최고 선수를 그냥 보내려는 팀은 없다. 특히 큰 야망을 품은 클럽이라면 스타 사수는 선택이 아닌 의무다. 콧대 높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팀 내 임금 정책을 깨면서까지 웨인 루니를 지켜냈다. ‘셀링 클럽(Selling Club; 우승보다 선수 판매 수입을 중시하는 구단)’이라던 토트넘 홋스퍼도 첼시로 가려던 루카 모드리치를 제자리로 끌어다 앉히고야 말았다. 간판스타는 단순한 선수 한 명이 아니라 팀의 자존심이다. 성공 의지의 상징자이기도 하다. 세스크 파브레가스 이적의 거센 역풍에 시즌 초반 비틀거렸다. 이제 아스널도 ‘맞으면 아프다’는 자연의 법칙을 깨달았으니 판페르시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가시적 결과도 판페르시를 잡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유리몸’ 오명을 씻은 판페르시는 올 시즌 45경기 34골을 기록했다. 압도적인 득점력이다. 올 여름 이적시장에 나가 “한 시즌 30골 넣는 공격수가 요즘 얼마씩 해요? 아이, 싸게 좀 부탁해요~”라고 아양 떨어봤자 대답은 뻔하다. 20골짜리 공격수만 해도 몸값이 2천만 파운드를 가볍게 넘긴다. 새 공격수 영입에 필요한 2~3천만 파운드를 차라리 판페르시에게 연봉으로 제시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 2004/2005시즌이 끝나고 빅리그로 이적하려는 이영표에게 PSV에인트호번은 “지금 너 같은 풀백을 사려면 지금 몸값의 세 배는 줘야 한다”며 하소연했다고 한다. 리스크가 높은 신규투자(새 선수 영입)보다 현재 보유 자산(판페르시)의 가치를 높이는 쪽이 훨씬 안정적인 선택이다.

그렇지만 판페르시의 입장에선 세상 밖으로 눈을 돌려봐야 할 시점에 왔다. 아스널에서 뼈를 묻을 순진파가 아니라면 직업인으로서 자기 이익 추구는 당연한 선택이다. 지금 판페르시는 이른바 전성기에 있다. 향후 3년간 최정점을 유지할 수 있다. 함께 뛰던 팀 동료들은 맨체스터 시티로 이직하면서 연봉을 두세 배씩 올렸다. 상대적 박탈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환경이다. 운동 선수로서의 영광 추구 면에서도 아스널은 최적의 자리가 아니다. 프리미어리그라는 거친 곳에서 30골을 넘기는 선수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명예, 즉 우승컵을 안을 자격이 충분하다. 판페르시로선 최정점에 도달한 바로 지금 우승권 클럽에서 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질 법하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시티 등의 유혹을 아스널과의 의리만 갖고 뿌리치기엔 대단히 힘들다. 돈으로 보나 우승 가능성으로 보나 판페르시로서는 아스널을 떠나는 게 상책일지 모른다.

금상첨화 시간이 판페르시 편에 서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판페르시의 이적료는 싸지고 연봉은 비싸진다. 판페르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기다리면 아스널은 속이 타 들어간다. 팬들은 빨리 판페르시와 재계약 하라며 성화일 게 뻔하다. 이적료가 점점 싸질수록 매력적인 외부 유혹도 많아진다. 재계약을 위한 현 소속팀 아스널의 조건도 점점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유로2012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부상 없이 새 시즌을 시작한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헨리 윈터는 “판페르시가 모든 에이스 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고 표현했다. 계약기간이 1년 남아있다곤 하지만 판페르시는 이미 자유계약신분이나 다름없다. 웹스터 규정상 만 28세를 넘긴 판페르시는 남은 1년2개월간 임금 총액을 지불함으로써 자유계약 신분을 획득할 수 있다. 현재 판페르시의 연봉은 주급 8만 파운드 수준으로 알려졌다. 선수의 능력을 감안하면 잔여 임금 총액은 매우 미미하다.

도대체 아스널이 판페르시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명대사 “돈을 보여줘(Show me the money!)”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국 현지 보도에 따르면, 아스널은 이미 판페르시에게 주급 20만 파운드(연봉 기준 약 190억원) 조건을 제시할 방침이라고 한다. 엄청난 금액이지만 여전히 판페르시를 잡기엔 부족해 보인다. 그 금액과 우승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는 맨체스터 시티가 버티고 있는 탓이다. 물론 아스널에서 8년을 보낸 판페르시가 “맨체스터 시티만큼 줘야 남겠다”고 야박하게 굴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비슷한 조건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게 아스널의 처지다.

그 위에 미래에 대한 약속이 얹혀져야지만 판페르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 아스널의 2010/2011시즌 재무제표에 따르면 현금 보유액이 무려 1억6천만 파운드(약 2,938억원)에 달한다. 숫자상으로는 과감한 스쿼드 투자가 가능하다. 올 여름 그렇게 할 거라는 현지 언론의 예상도 있었다. 물론 언론의 예상대로 아스널이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다. 아스널이 우승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뻔하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만수르,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있는 한 ‘벵거 유치원’의 우승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판페르시를 잡으려면 아스널은 지금의 구단 운영 철학을 스스로 깨야 한다. 다행히 2011년 여름 아르센 벵거 감독은 노장 선수를 대거 영입함으로써 변화의 징조를 보였다. 에미리츠 스타디움 신축 대출금 상환 완료까지 갈 길이 아직 멀지만, 우승 능력을 갖추지 못한 클럽의 브랜드 이미지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매출 극대화(빚을 하루빨리 다 갚으려면)를 위해선 최소한의 영광이 필수불가결이다. 그를 위한 의지 표명의 마지노선이 바로 판페르시와의 재계약 성공이다. 만약 판페르시가 근시일 내에 아스널을 떠난다면, 이는 곧 아스널 스스로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다”고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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