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고성환 기자] 2024 파리 올림픽이 2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한국 배드민턴으로서는 명과 암이 극명히 엇갈린 대회였다.
2024 파리 올림픽은 12일 오전(이하 한국시간) 폐막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 선수단은 11일 성승민이 근대 5종 여자부에서 동메달을, 박혜정이 역도 여자 81kg 이상급에서 은메달을 추가하면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박혜정의 은메달이 이번 대회 한국 선수단의 마지막 메달이었다.
한국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역대 최고 성적에 버금가는 성과를 거뒀다. 48년 만에 가장 적은 144명의 선수단을 파견하면서 우려가 컸다. 대한체육회도 금메달 5~6개를 목표로 잡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한국은 '소수 정예'로 대박을 냈다.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를 따내면서 총 메달 32개를 수확했다. 이는 2008 베이징 대회와 함께 역대 공동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금메달 13개 역시 2008 베이징, 2012 런던 대회에서 작성한 역대 단일 대회 최다 금메달 타이 기록이다.
양궁에서 금메달 5개를 싹쓸이했고, 은메달과 동메달도 각각 하나씩 획득했다. 사격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3개, 펜싱에서도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따냈다. 태권도도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보탰다.
배드민턴도 금메달 하나, 은메달 하나를 수확하며 값진 성과를 이뤘다. 여자 단식에서 안세영(삼성생명)이 정상에 오르며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방수현 이후 28년 만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혼합복식에서 김원호(삼성생명)-정나은(화순군청) 조가 은메달을 따냈다.
안세영을 위한 대관식이었다. 그는 스스로 '마지막 퍼즐'이라고 밝힌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제 '그랜드슬램(올림픽·세계선수권대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대회)'까지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단 하나만 남겨둔 안세영이다.
안세영의 마지막 상대는 세계랭킹 9위 허빙자오(중국)였다. 그는 허빙자오를 가뿐히 2-0(21-13 21-16)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1게임 초반엔 리드를 허용하기도 했지만, 구석을 찌르는 드롭샷과 끈질긴 수비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안세영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몰아치면서 7년 동안 꿈꿨다던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올림픽 우승이 현실이 된 순간. 안세영은 그대로 코트에 쓰러져 기뻐했고, 김학균 감독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훔쳤다. 이로써 안세영은 생애 첫 금메달을 따내면서 한국 배드민턴에 28년 만의 여자 단식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 여자 배드민턴 선수가 올림픽 단식 결승에 오른 것 자체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금메달리스트 방수현 이후 처음이다.
김원호-정나은의 투혼 가득한 은메달도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세계랭킹 8위인 김원호-정나은 조는 이번 대회 내내 드라마를 썼다. 조별예선서부터 1승 2패로 탈락 위기에 몰렸지만, 3개 팀 동률 속에서 득실 차로 앞서면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둘은 8강에서도 말레이시아 팀을 꺾은 뒤 꿈 같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사실 김원호-정나은 조의 결승행을 점친 이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 둘은 지난해 6월부터 한 조를 이뤘다. 아직 결성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계랭킹 10위권 안에 진입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김원호-정나은의 꿈은 4강 진출로 끝이 아니었다. 둘은 준결승에서 '세계랭킹 2위' 서승재(삼성생명)-채유정(인천국제공항) 조와 집안 대결을 펼쳤고, 엄청난 혈투 끝에 21-로 승리했다. 김원호는 3세트 중반 비닐봉지에 구토를 할 정도로 코트에 모든 걸 쏟아붓는 투혼을 보여줬다. 승리한 김원호와 정나은도, 아쉽게 패한 서승재와 채유정도 모두 박수받아 마땅한 명승부였다.
김원호와 정나은은 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정시웨이-황야충(중국)에 0-2로 패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다. 그럼에도 2008 베이징 대회(이용대-이효정 혼합복식 금메달, 이효정-이경원 여자복식 은메달) 이후 16년 만의 복식 은메달을 따내며 뜻깊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김원호는 1992 바르셀로나 대회 여자 복식 동메달, 1996 애틀랜타 대회 혼합 복식 금메달과 여자 복식 은메달을 차지한 어머니 길영아 삼성생명 감독과 함께 한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모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빛만 있진 않았다. 안세영이 우승 직후 충격적인 발언을 터트리면서 모든 기쁨이 순식간에 묻히고 말았다. 귀중한 성과를 내고도 그림자가 너무 컸다.
안세영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내려오자마자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대한배드민턴협회 운영을 저격하면서 대표팀 은퇴까지 시사하는 말을 꺼냈다. 안세영은 "내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쉽게 나을 수 없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대표팀에 많이 실망했다"라며 "이 순간을 끝으로 대표팀하고는 계속 가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파장은 일파만파 커졌고, 협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자 안세영은 6일 새벽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선수관리에 대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떠넘기는 협회나 감독님의 기사들에 또 한번 상처를 받게 된다"라며 "누군가와 전쟁하듯 이야기 드리는 부분이 아니라 선수들의 보호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은퇴라는 표현으로 곡해하지 말아달라"라고 심경을 전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조사에 착수했다. 문체부는 사건 직후 "안세영 선수의 언론 인터뷰와 관련해 경위를 파악한다"라며 "현재 2024 파리 올림픽이 진행 중인 만큼 올림픽이 끝나는 대로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개선조치의 필요성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후로도 안세영은 협회와 진실공방을 이어갔다. 그는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배드민턴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 불참했고, 애꿎은 김원호-정나은에게 불똥이 튀었다. 대한체육회 측은 안세영이 본인 의사로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 나서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세영의 말은 달랐다. 그는 지난 7일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내가 기자회견을 안 나간 건 기다리라고만 하니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라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나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라고 반박했다.
안세영은 "한국에 가서 내 입장을 다 얘기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지만, 입국 현장에서도 말을 아꼈다. 그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협회와) 정말 싸우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었단 것"이라며 "이제 막 (한국에) 도착했는데 아직 협회랑도 이야기한 게 없다. 또 (삼성생명) 팀이랑도 상의된 게 없어서 더 자세한 건 상의한 후 말씀드리도록 하겠다"라고 다음을 기약했다.
협회도 빠르게 공식 입장을 내면서 안세영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10여장이 넘는 보도자료를 통해 쟁점 사항이던 부상 방치와 기자회견 불참 강요에 대해 정면 부인했다. 협회는 "선수 의사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국제대회에 참가시키지 않았다"라고 선을 그으며 "오히려 2023 덴마크, 프랑스오픈에 불참하는 과정에서 구비서류를 제출 한 바 있다"라고 항변했다. 인터뷰 불참도 지시한 적 없다며 상반된 주장을 내놨다.
안세영의 발언으로 서승재 혹사 논란도 주목받게 됐다. 안세영은 단식과 복식 구별 및 전문화, 지나치게 많은 출전을 지적하면서 선수 보호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단 본인의 부상 문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승재는 이번 대회에서 23시간 사이에 3경기를 뛰는 살인적인 일정을 견뎌야 했다. 그는 채유정과 함께 유력한 혼성 복식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강민혁(삼성생명)과 함께 남자 복식까지 동시에 소화하면서 엄청난 체력적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승재는 남자 복식 8강 탈락, 혼성 복식 4위에 그치며 '노메달'로 대회를 마쳤다.
방수현 MBC 해설위원도 이 부분을 짚었다. 그는 서승재와 채유정이 이번 대회에서 10경기 가까이 뛰었다며 선수들 보호를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방수현 위원은 안세영의 발언 타이밍에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협회 운영에 대해선 쓴소리를 남겼다.
결국 모든 시선은 안세영과 협회의 진실공방으로 향한다. 양 측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안세영이 또 어떤 이야기를 꺼내는가에 따라 여론이 들썩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결말을 맞든 간에 이번 올림픽이 한국 배드민턴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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