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의 축구話] 우리는 왜 EPL에’만’ 열광하는가
입력 : 2012.04.1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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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맨체스터의 주인은 누굴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 중 누가 웃을까? 전통의 명문과 신흥 부호의 ‘맞짱’에서 승리하는 쪽은 누구일까? 잉글랜드 축구의 패권 향방에 전세계 축구 팬들의 눈길이 쏠린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믿는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가 곧 유럽 축구라고 생각한다. 마치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서양인을 보고 “미국인”이라고 단정짓는 감각처럼 말이다. 프리미어리그의 챔피언을 곧 유럽의 패자(覇者)로 인식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면 대단한 성공이지만, 그 외의 리그에 있으면 “열심히 해서 꼭 프리미어리그로 가라”고 격려한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에서도 맨유와 맨시티의 우승 다툼에 열광한다. ‘내 것’인 영국인보다 어쩌면 더 뜨겁게.

한국 사회의 프리미어리그 사랑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렇진 않다. 우리 말고도 프리미어리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많다. 태국에서는 프리미어리그 빅클럽 맞대결이 벌어질 때마다 양팀 서포터들이 모여 단체관전을 한다. 중국에서는 프리미어리그 시청자들이 너무 많아서 기업들이 아예 중국어 브랜드 로고를 프리미어리그 구단의 유니폼에 달 정도다. 프리미어리그 팬들이 “전세계가 열광하는 프리미어리그”라고 외쳐도 근거 없는 호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프리미어리그 일변도 유럽 축구관은 꽤 흥미롭다. 높은 관심도에 비해 시장 자체가 그리 활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한국 내 프리미어리그의 최종 소비자는 일반 팬 또는 TV시청자다. 이들의 소비지출 패턴은 매우 소극적이다. 프리미어리그를 소비하기 위한 직접 지출이 적다는 뜻이다. 직접 관전 기회가 없는 탓에 한국에서는 TV시청이 유일한 체험방법인데 이게 무료에 가깝다. 국내 TV중계권자 SBS ESPN은 선투자금(중계권 구입비용) 회수를 위해 광고 판매와 함께 온라인 생중계 권리를 재판매한다. 이렇게 해도 SBS ESPN이 프리미어리그 중계로 이윤을 남겼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황금알이라는 프리미어리그도 한국에선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니다. 해외 스포츠 시장의 거대한 축인 스포츠 베팅도 한국에서는 규제가 심해 시장 확대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어리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한다. 국내 정보 유통의 대표적 창구인 포털사이트의 ‘해외축구’ 뉴스 섹션도 프리미어리그 관련 소식으로 채워진다. 박지성이란 ‘대박’ 건수가 있다곤 하지만 실제 시장성에 비해 점유율이 지나치게 높다. 박지성이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올 시즌도 프리미어리그의 정보 독점은 여전하다. 맨유의 후보 선수 대런 깁슨의 에버턴 이적 기사가 당당히 헤드라인으로 뽑힐 정도다. 퍼거슨 감독이 방귀 한번 뀌면 알렉산드로 델피에로의 득점 소식쯤 간단히 뒤로 밀어낸다.

실제 시장 크기에 비해 프리미어리그가 한국의 정보유통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영어의 힘이 크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사는 해외축구 보도에 있어서 영국발(發) 보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언론 책임론이라기보다 부득이한 현실이다. 진출해있는 한국인 선수가 가장 많은데다 언어 장벽이 낮으니 당연히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탁월한 정보 접근성은 프리미어리그의 세계적 인기의 근간이 되고 있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축구 소식까지 영국 언론 보도의 도움을 받는다. 구자철 관련 보도의 파편화 현상이 좋은 예다. 그가 뛰는 분데스리가의 우승 경쟁을 다룬 보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초점은 오로지 구자철 개인의 경기 중 활약상에만 집중된다. 만약 활동무대가 프리미어리그였다면 구자철은 이미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을 것이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은 매니아의 영역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을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중심 보도는 국내 축구선수들의 목표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국내 선수들에게 인생 목표를 물어보면 백이면 백 “프리미어리그”라고 대답한다. 물론 타 국가의 선수들도 대개는 프리미어리그 이적을 꿈꾼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쏠림 현상이 심하진 않다. 축구선수는 분명히 자기에게 맞는 축구 스타일이 있다. 한 팀에서 죽을 쑤던 선수가 팀을 옮겨 간판스타로 맹활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리그도 마찬가지다. 맨유에서 ‘엉터리’ 취급을 받았던 디에고 포를란은 스페인 라 리가에서 세계적 스트라이커로 발돋움했다. 라 리가가 프리미어리그보다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올 시즌 UEFA챔피언스리그와 UEFA유로파리그의 4강 8개 팀 중 라 리가는 무려 다섯 팀을 배출했다. 프리미어리그는 달랑 한 팀뿐이다. 축구 스타일, 문화, 일상생활 등 라 리가의 환경이 포를란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부분이 쉽게 간과되는 것처럼 보여 아쉽다. 자기 스타일에 상관없이 다들 프리미어리그만 바라본다. “일생의 꿈”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한 아시아 최고 공격수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우리는 너무나 생생히 목격했다. 인터넷 창만 띄우면 프리미어리그 기사밖에 없고, 프리미어리그가 아니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 탓이다.

맨체스터 라이벌의 우승 경쟁에서 불꽃이 팍팍 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두 팀은 올 시즌 UEFA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유럽 축구적 관점에서 본다면 올 시즌 두 팀은 소위 ‘2류’다. 2인자들의 대회인 UEFA유로파리그에서마저 떨어졌으니 철저히 유럽 축구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주부터 유럽 축구의 최정상을 향한 ‘4대천황’의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축구 역사상 위대한 그 이름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나선다. 독일 최고의 명문 바이에른 뮌헨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대표 첼시가 ‘엘 클라시코’의 높은 벽에 도전한다.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과는 별개로 유럽 축구 시장에서 UEFA챔피언스리그의 위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른바 ‘계급’이 다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부진에 빠진 첼시가 만약(문자 그대로 ‘만약에’) 본 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한다면 맨체스터의 두 구단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국민영웅 박지성의 소속팀이 우승 경쟁을 벌이니만큼 한국 사회의 높은 관심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팀이 유럽 축구를 대변하진 못한다. 두 팀 모두 내년 시즌 심기일전해서 다시 UEFA챔피언스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올 시즌, 지금 당장은 유럽 축구 2류 팀들끼리의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올 시즌 34골밖에 넣지 못한(?) 로빈 판페르시보다 리그에서만 41골을 터트린 리오넬 메시(시즌 63골)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시즌 53골)의 경이적 득점력을, 칼치오폴리 파문 이후 이탈리아 축구 정상으로 복귀하려는 유벤투스의 부활을, 홈 평균관중 80,495명의 뜨거운 열기를 등에 업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분데스리가 2연패 행진을 주목하면 유럽 축구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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