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LEGEND] 차범근의 위대한 분데스리가 족적 (下)
입력 : 2013.09.20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차범근이 분데스리가를 떠난 지 24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독일의 많은 축구팬들은 한국하면 차범근부터 떠올린다. 분데스리가에서 쌓아온 차범근의 업적은 그만큼 위대하다. 한 평생 축구 현장을 누빈 축구전문대기자의 낡은 취재수첩을 펼쳐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족적을 되짚었다.

프랑크푸르트는 1979/1980시즌을 앞두고 프랑스 1부리그 팀, 분데스리가 2부리그 팀 등과 7번의 프리시즌 경기를 치르면서 개막을 준비했다. 차범근은 7월 21일 분데스리가 2부 소속 보르마티아 보름스와 경기에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고 처음 출전해 헤딩골을 터트렸다. 입단 이후 첫 골이었다. 이후 8월 11일 도르트문트와 시즌 개막전에 팬에게 본격적으로 선을 보였다. 독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축구전문지 '키커'는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출전한 차범근을 1979/1980시즌 1라운드 '베스트11'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데뷔전을 치렀던 차범근이 얼마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력 지역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은 한 달에 한 명씩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에서 화제가 된 인물을 '이달의 인물'로 선정해 소개하는데 차범근은 '8월의 인물'로 선정, 지면을 장식했다. 팀의 터줏대감이자 주장인 율겐 그라보브스키는 차범근을 특히 좋아했다. 훈련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정규 훈련이 끝난 뒤에도 혼자서 30분 이상 개인운동을 빼놓지 않는 차범근의 성실함이 36세 노장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처럼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면서 빠른 시간 안에 팀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지만 계약과정까지는 우여곡절과 행운도 따랐다.  

브레멘에 도착한 차범근은 당장 테스트를 받게 됐다. 드리블 헤딩 볼 리프팅 등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는 과정에서 볼을 높이 던져주고 떨어지는 것을 논스톱으로 슈팅하는 테스트를 받았는데 이 때 차범근은 4개의 슈팅을 모두 성공시켰다.

브레멘 측에서는 흡족한 표정으로 "3~4일 동안 선수들과 함께 합숙훈련을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계약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차범근이 테스트를 받으면서 4개의 골을 성공시킨 것이 '연습게임을 하면서 혼자 4골을 넣었다'고 신문에 보도됐던 것이다. 물론 취재기자의 일방적인 미스였다. 그러나 그 미스는 차범근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브레멘 측에서 막 계약을 체결하려고 하는데 프랑크푸르트의 슐테 코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사인을 하지 않았으면 하루 이틀만 더 계약을 지연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미 외국인 보유 한도를 채우고 있었던 프랑크푸르트는 이 '오보'를 보고 깜짝 놀라 부랴부랴 스위스 국적인 한 선수를 다른 팀으로 이적 시켰고, 서둘러 차범근을 영입하려 했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가 제시한 조건도 브레멘보다 좋았다. 차범근은 이런 '기연과 행운'으로 프랑크푸르트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입단 뒤 실력으로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오히려 행운을 잡은 것은 프랑크푸르트였을지도 모른다.

차범근은 1979/1980시즌 3차전이었던 8월 28일 슈투트가르트와 홈경기에서 역사적인 분데스리가 데뷔골을 폭발시킨다. 이어 9월 1일 브라운슈바이크와 4차전에서 연속골을 작렬하며 팀의 연승을 이끌었다. 두 번 모두 헤딩골이었다. 통산 98골을 향한 대장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첫 골을 넣은 뒤의 인터뷰 내용이다.

독일에 진출한 후 줄곧 공격수로 뛰었던 차범근은 1987/1988시즌에 처음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 시즌에 차범근은 25경기에 나서 4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의 대미를 UEFA컵 우승으로 장식했다. 이제 1988/1989시즌이 시작하려 하고 있다. 슈퍼스타 차범근의 현역 시절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 전 시즌까지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통산 279경기 출장에 95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즌을 앞둔 차범근의 목표는 당연히 300경기 출장, 100골 달성에 모아졌다. 팬의 관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지막 시련이 차범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범근은 1989년 1월 시즌 휴지기에 진행된 스페인 전지훈련 도중 아약스 암스테르담과 친선경기에서 상대선수와 부딪치면서 갈비뼈를 다쳤다. 독일에 진출한 이후 척추(1981년), 오른쪽 말목 인대 수술(1985년)에 이은 3번째 주요 부상이었다. 차범근은 부상 직후 "300경기 출전, 100골 목표를 달성하고 은퇴하려 했는데 차질을 빚을까 안타깝다"고 말했다.

마지막 시즌의 부담, 뜻하지 않은 부상 등이 겹치면서 목표 달성은 쉽지 않게 됐다. 시즌 전기 일정에서 2골을 넣었던 차범근은 1989년 3월12일 도르트문트와 후기 4차전에서 시즌 3호이자 통산 98호골을 넣었다. 그의 296번째 분데스리가 경기였다. 300경기 출장, 100골에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차범근은 그 해 4월 15일 쾰른과 홈경기에 출전해 분데스리가 통산 300경기 출전의 금자탑을 세웠다. 레버쿠젠은 시즌 8경기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는 300경기 출장은 이룬 뒤 "부상 등 많은 시련 속에서도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300경기 출장 기록을 수립한 데 대해 큰 보람을 느낀다. 남은 8경기에서는 골을 넣는 데 힘써 100골 목표도 꼭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한 경기, 한 경기 줄어들수록 골을 터지지 않았다. 차범근은 한 경기를 남겨놓았던 함부르크 원정경기에서 통산 307째 경기에 출전했지만 전반 20분 만에 상대 선수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부상으로 교체아웃 됐다. 시즌 한 경기를 남겨놓고 98골을 기록 중이어서 100골 달성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드디어 6월 17일 카이저스 라우테른과 시즌 최종전이 벌어졌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고별전을 치렀지만 골은 없었다. 통산 기록은 308경기 출전에 98득점으로 남았다.

차범근이 기록한 98골은 모두 필드골이었다. 페널티킥을 통해 얻은 골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독일에서 페널티킥을 찬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100골을 달성했다면 수치상의 의미는 있었겠지만, 98골이라는 미완의 숫자는 더욱 심오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여지를 남겨둔 차범근의 기록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한국축구의 무한한 도전을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3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세운 뒤 필자와 10년 동안의 독일 생활을 결산하는 특별 인터뷰를 가졌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차붐’ 차범근이 10년 동안 어떤 각오로 버텨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분데스리가에서 넘어야 했던 첫 관문은?
능력 있는 선수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어린 선수, 처음 소개된 선수들을 그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어 달 정도쯤 누구나 '개발에 땀 나듯' 잘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버리지요. 실제 상당 기간 스타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던 선수들이 몇 년 후 어느 팀에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알 수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자리를 굳히기 전에 잘못하면 사정 없이 날아가는 거지요. 기라성처럼 많은 선수들이 벤치에 초조히 앉아서 남의 실수를 고대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오금이 떨려서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지요.

-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의 고충은 없었는지?
기술, 기량만 인정받고 나면 다른 어려움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경기 중 망나니처럼 뛰어 달아나는 나를 잡으려다 기진맥진한 상대 팀 수비수들이 "한국 놈들이 어쩌구 저쩌구"하고 지분거리도 하지요. 처음엔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차차 "나를 약 올리기 위한 수단이로구나"하고 알게 됐습니다. 이제는 유일한 동양 선수라 이색적인 존재가 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가는 데마다 날 찾고 내세워 팀의 간판처럼 들먹이게 됐지요.

- 10년을 한결 같이 주전 선수로 뛸 수 있었던 비결은?
가능한 모든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경기장에서 전력을 쏟아 붓는 거지요. 축구란 감각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순간적으로 찬스 포착과 기민한 반응으로 승패를 가름하게 됩니다. 그런데 잡다한 일에 신경을 쓰고 몸 관리를 게을리하다 보면 경기장에서 정신 집중을 할 수도, 90분간 최고의 컨디션으로 뛸 수도 없게 됩니다. 나는 날 괴롭히거나 귀찮게 구는 일들을 싫어하고 그래서 많은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절간에서 사는 수도승이라나요. 하지만 그런 철저한 생활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차범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 선수 생활을 결산하면서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분데스리가 베스트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즉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욱이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정열과 패기였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던 곳에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 서독 생활에서 얻은 교훈은?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 나보다 잘하는 선수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훌륭함을 인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세, 그리고 페어플레이 정신은 이 다음 지도자 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될 교훈들입니다.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선수라도 그 기량을 인정하고 경기에 출장시키는 모습을 목격할 때엔 존경심이 절로 우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 프로 선수로의 10년을 마감하는 기분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그 전에 선수생활을 그만 둘 때 굉장히 섭섭할 줄 알았는데 정작 때가 이르니 오히려 그만 둘 날이 기다려지는데요. 지친 탓일까요. 이제 내게 새로운 할 일들이 있고 선수생활은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선수 차범근, 그가 은퇴한지 2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차범근이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데는 아직까지 별다른 이의가 없는 듯하다. 한국 축구는 언제쯤 '차범근을 뛰어 넘는 선수'을 볼 수 있을까. 차범근은 과연 그의 남은 축구인생에서 '불세출의 선수'를 뛰어넘는 성과를 남길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들은 역설적으로 차범근이라는 선수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웅변해주고 있다.


글=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사진=차범근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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