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LEGEND] “11전 3승5무3패, 버마는 진정한 맞수였다”
입력 : 2013.09.20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유난히 버마축구와 인연이 많았던 한국프로축구연맹 김정남(70) 부총재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희미한 기억 너머로 버마 축구를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시상대에 버마 대표팀 주장과 나란히 서서 우승 트로피를 치켜든 흑백 사진을 보여주자 그제서야 얽혔던 실타래에서 버마축구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김정남 부총재가 버마 축구와 처음 만난 것은 국가대표 발탁 이듬해인 1963년이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버마 원정길에 오른 국가대표팀은 두 차례 친선경기에서 1승 1무를 기록했다. 이때만 해도 버마는 그저 대한민국이 가볍게 상대할 대상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대결, 2-2 무승부를 이룬 한국은 1961년 버마 원정 친선 경기에서 3-0으로 완승한 것이 자신감의 근거다. 게다가 이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한 최정민은 김정남 부총재가 버마 축구팀에 대한 질문을 할 때마다 “야, 버마 별거 아니야”라고 큰소리 치는 바람에 그저 손쉬운 상대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승 1무를 거둔 버마 원정에서 김정남 부총재는 결코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버마 대표 선수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지 않았다. 대표 선수 대부분 170cm 이상은 되는 듯싶었다.

“신체적인 조건이 좋은데다 매우 빨랐다. 특히 공격수들의 스피드는 단거리 육상선수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게다가 기술도 상당히 좋았다.”

김정남 부총재가 기억하는 버마 대표 선수는 작은 키에 까무잡잡하고 스피드만 뛰어난 그런 동남아 선수들과는 사뭇 달랐다.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미뤄 볼 때 외국인 코치가 팀을 지도 했을 것이라는 기억이다. “크라머 코치가 일본 대표팀을 지도할 60년대 초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인 코치가 선수 지도를 했다”는 김정남 부총재는 버마 대표팀도 외국인 코치의 지도를 받은 게 확실하다고 했다.

버마가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처음 일격을 가한 것은 1966년 8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배 대회였다. 라디오 실황중계에 귀를 기울이던 국민들은 연발하는 “안타깝습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에 아쉬워하기 보다는 대한민국을 2-0으로 꺾은 버마팀에 대한 궁금증이 커 갔다.

4개월 뒤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만난 버마는 역시 아시아 최강이었다. 불운(?)하게도 버마와 예선에서 한 조를 이룬 대한민국은 또다시 0-1으로 패해 예선 탈락이라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버마는 그 대회에서 우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중국이 공한증을 갖고 있듯이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내색은 안했으나 어느새 버마는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 돼 있었다. 조 추첨을 하면 제발 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대한민국이 1960년대 참가할 수 있었던 국제대회는 메르데카대회와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 대회였다. 어찌된 일인지 킹스컵에서는 조우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메르데카배는 출전만 하면 버마와 한 차례는 경기를 치러야 했다. 1966년 두 차례 경기를 모두 패하고 이듬해 만난 버마는 정말 상대하기 싫은 팀이었다.

“우리가 버마를 피하고 싶은 상대로 생각했듯 버마도 우리를 아마도 벅찬 상대로 여겼던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버마도 대한민국과 경기에서는 매우 신중한 경기를 펼쳤다.”

1967년 메르데카배에서 대한민국은 예선에서 버마에 1-0으로 승리했다. 버마를 이기고 나니 결승까지 승승장구였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승에서 120분간 혈전을 치르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대한민국과 버마는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예선에서의 승리, 결승에서 무승부로 공동우승을 차지하고 나니 조금은 ‘공(恐)버마증’이 풀린 듯 했다.

메르데카배를 치른 뒤 버마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변화했다. 만나기 싫은 상대에서 어차피 대결해야 할 상대라면 초반에 만나 ‘박살’을 내자는 게 대표팀의 분위기였다.

“예선에서는 피해보자는 것이 예전의 생각이었다면 예선이든 결승이든 부담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초반에 버마를 탈락시켜 우승의 걸림돌을 제거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1970년, 대한민국과 버마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시안게임을 4개월 정도 앞두고 메르데카배 예선에서 만났다. 결과는 1-0 승리. 그러나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예선에서는 오히려 0-1로 패해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12월 20일 방콕국립경기장에서 대한민국과 버마는 금메달을 놓고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 주장 김정남은 예선에서의 패배가 부담스러웠지만 오히려 이것이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부담이 조금은 덜어든 느낌이었다.

“김호가 스토퍼를 맡고 내가 스위퍼 역할을 하면서 또다시 골을 내주지 말자고 굳게 결의했다. 어찌나 신중한 경기를 하던지 대부분 플레이가 양 팀 지역 중간 지점에서 전개됐다. 두 팀 모두 수비를 두텁게 하고 역습을 노리는 것이 닮은꼴이었다.”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경기는 공동우승으로 처리됐다. 3년전 메르데카배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다. 김정남 부총재가 갖고 있는 버마와 관련 유일한 사진이 버마 주장과 시상대에 함께 올라트로피를 번쩍 들고 있는 사진이다.

“이름이 생각날 듯하면서도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먼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비교적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교류가 있었지만 유독 버마 선수들과 친교가 없었던 것은 지나친 라이벌 의식 때문이었다. 혹시 잘못 될까봐 경기장 밖에서는 만남조차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버마와 경기를 앞두고는 감독들로부터 유난히 ‘체력’과 ‘정신력’이 강조됐다.

라디오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아시아의 강호 버마축구를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971년 창설된 박스컵국제 축구대회였다. 혹여 예선에서 붙여 놨을 경우 잘못 되기라도 하면 흥행에 낭패를 보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지라 각기 다른 조에 배정했다.

조직위원회의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1971년 5월13일 드디어 대한민국과 버마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만났다. 아시안게임 이후 5개월만이었다. 역시 버마는 강팀이었다, 신중한 샅바싸움이 120분간 이어졌다. 그런데도 아무도 지루하다고 하지 않았다.

“동대문운동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쩌다 기침이라도 하면 아주 크게 들릴 정도였다. 가끔 들려오는 장탄식만이 운동장을 휘감고 하늘로 올라갔다.”

대한축구협회는 시상식을 미룬 채 숙의에 들어갔다. 잠시 후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과 버마의 결승전은 승부가 나지 않아 이틀 뒤 재경기를 하기로 결정됐습니다.”

본부석 건너편에서 터진 “와”하는 함성이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한 여름 무더운 날씨에 지친 선수들은 운동장 잔디에 벌렁 누워 버렸다. 이틀 뒤 사력을 다했으나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정남 부총재는 대표 선수 10년의 마지막 국제경기를 무승부로 끝낸 것이 아쉬웠지만 상대가 버마인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남 부총재는 태극마크를 달고 있던 1962년부터 대표팀에서 은퇴한 1971년 까지 10년간 버마와 11차례 대결했다.

“기록을 살펴보니 묘하게도 11차례 만나 3승 5무 3패를 기록했다. 골도 6골을 넣고 실점도 6골을 한 것을 보면 버마는 우리의 진정한 맞수였던 것 같다.”

김정남 부총재는 버마축구의 몰락을 보면서 생긴 상념을 요즘도 가끔 되새긴다.

“축구는 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축구 발전을 할 수 없다.”

김정남 부총재의 눈동자엔 어느새 몽애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인터뷰=김덕기 (스포탈코리아 대표)
사진=한국축구100년사

오늘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