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요즘 대표선수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파주에 마련한 국제적인 규모와 시설을 갖춘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파주 NFC)를 이용하고 있다. 가끔은 경기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특급호텔에 1인 1실을 사용케 하고 있으나 50∼70년대 대표선수들에게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다. 70년대에도 호텔을 훈련캠프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경기를 앞둔 며칠뿐이었다.
국가대표팀이 훈련캠프로 호텔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여관에 훈련캠프를 차렸다. 대표팀 숙소로 유명했던 여관으로 서울에는 양지여관, 지성여관, 학성여관이 있었고 겨울 훈련지였던 진해에는 만경장여관을 꼽을 수 있다. 이 여관들은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50∼70년대 선수들에게는 갖가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종로2가 YMCA 옆에 있던 양지여관은 단층 한옥으로 평양이 고향인 초로의 부부가 운영했으며 음식 솜씨가 뛰어난 안주인의 ‘동그랑땡’ 솜씨가 일품이었다. 양지여관은 ‘ㄷ’자 한옥에 격자무늬의 미닫이 문, 뒤쪽에 연탄광과 화장실이 있었다. 방음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아 옆방의 숨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남녀가 이 여관에 묵기라도 하는 날이면 선수들은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지성여관은 종로5가 평화극장 아래쪽 골목에 위치해 있던 곳으로 아담한 단층 한옥이 인상적이었다. 종로 입구에 위치했던 학성여관 역시 분위기가 양지여관, 지성여관과 비슷했다.
진해의 만경장여관은 동계훈련이 시작되면 축구팀 전용 숙소로 사용됐고 대표팀이 소집되면 으레 대표팀 몫이었다.
74서독월드컵 예선전에 대비해 대표팀이 구성된 것은 72년 11월이었다. 민병대 감독, 손명섭 문정식 코치에 주장은 박병주였다. 대표팀 사퇴를 선언한 이회택은 끝내 합류를 거부,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다.
74서독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 예선전에 대비, 진해 만경장 여관에서 동계훈련을 처음 시작했던 1973년 1월 선수들이 시신과 2주일이나 함께 지내는 등골이 오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진해는 날씨가 온화해 겨울 훈련캠프로는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혀 겨울이면 축구선수들로 도시가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만경장 여관은 5층이지만 여관으로 지은 건물이라 외관상 그리 크지 않았다. 1층부터 5층까지 방이 있었고 옥상에는 여관에서 사용하는 물을 저장하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방수처리한 물탱크가 있었다.
대표팀은 주장 박병주를 비롯,김호 정규풍 이세연 김재한 차범근 등이 주축을 이뤘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흡연 장면이 적발된 정규풍이 스스로 짐을 챙겨 떠나는 등 캠프 분위기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막내인 차범근은 이런 분위기를 애써 외면하며 훈련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경장 여관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비상등을 켠 앰뷸런스가 여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오후 훈련을 나갈 때만 해도 아무 일 없었던 여관에 경찰과 앰뷸런스가 보이자 선수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으나 아무도 이 사태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민병대 감독이 여관에 도착하자 주인이 뛰어나오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는 민병대 감독 표정에 변함이 없으니 선수들은 더욱 궁금했다.
잠시 후 하얀 천을 씌운 들것이 여관에서 나오는 것으로 미뤄 누가 죽은 것이 분명했다. 사건의 전말은 5층에 장기 투숙하던 모항공사 직원이 2주일 전 술에 취해 옥상에 있는 물탱크 문을 화장실 문인 줄 알고 잘못 열고 볼일을 보려다 실족해 빠져 죽은 것이었다.
선수들은 그것도 모른 채 2주일이나 시신이 떠 있는 물을 먹고 지낸 것이다.
이날 저녁 손명섭 문정식 코치와 선수들은 여관을 옮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민병대 감독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민병대 감독은 굵은 목소리로 “임자들은 송장 썩은 물을 먹었으니 이제 운수대통했네. 이곳이 명당인데 가기는 어딜 가나”라며 껄껄 웃었다.
여관을 옮기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차범근은 이 일이 있은 뒤 한동안 구역질을 하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국가대표팀이 훈련캠프로 호텔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여관에 훈련캠프를 차렸다. 대표팀 숙소로 유명했던 여관으로 서울에는 양지여관, 지성여관, 학성여관이 있었고 겨울 훈련지였던 진해에는 만경장여관을 꼽을 수 있다. 이 여관들은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50∼70년대 선수들에게는 갖가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종로2가 YMCA 옆에 있던 양지여관은 단층 한옥으로 평양이 고향인 초로의 부부가 운영했으며 음식 솜씨가 뛰어난 안주인의 ‘동그랑땡’ 솜씨가 일품이었다. 양지여관은 ‘ㄷ’자 한옥에 격자무늬의 미닫이 문, 뒤쪽에 연탄광과 화장실이 있었다. 방음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아 옆방의 숨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남녀가 이 여관에 묵기라도 하는 날이면 선수들은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지성여관은 종로5가 평화극장 아래쪽 골목에 위치해 있던 곳으로 아담한 단층 한옥이 인상적이었다. 종로 입구에 위치했던 학성여관 역시 분위기가 양지여관, 지성여관과 비슷했다.
진해의 만경장여관은 동계훈련이 시작되면 축구팀 전용 숙소로 사용됐고 대표팀이 소집되면 으레 대표팀 몫이었다.
74서독월드컵 예선전에 대비해 대표팀이 구성된 것은 72년 11월이었다. 민병대 감독, 손명섭 문정식 코치에 주장은 박병주였다. 대표팀 사퇴를 선언한 이회택은 끝내 합류를 거부,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다.
74서독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 예선전에 대비, 진해 만경장 여관에서 동계훈련을 처음 시작했던 1973년 1월 선수들이 시신과 2주일이나 함께 지내는 등골이 오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진해는 날씨가 온화해 겨울 훈련캠프로는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혀 겨울이면 축구선수들로 도시가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만경장 여관은 5층이지만 여관으로 지은 건물이라 외관상 그리 크지 않았다. 1층부터 5층까지 방이 있었고 옥상에는 여관에서 사용하는 물을 저장하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방수처리한 물탱크가 있었다.
대표팀은 주장 박병주를 비롯,김호 정규풍 이세연 김재한 차범근 등이 주축을 이뤘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흡연 장면이 적발된 정규풍이 스스로 짐을 챙겨 떠나는 등 캠프 분위기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막내인 차범근은 이런 분위기를 애써 외면하며 훈련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경장 여관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비상등을 켠 앰뷸런스가 여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오후 훈련을 나갈 때만 해도 아무 일 없었던 여관에 경찰과 앰뷸런스가 보이자 선수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으나 아무도 이 사태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민병대 감독이 여관에 도착하자 주인이 뛰어나오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는 민병대 감독 표정에 변함이 없으니 선수들은 더욱 궁금했다.
잠시 후 하얀 천을 씌운 들것이 여관에서 나오는 것으로 미뤄 누가 죽은 것이 분명했다. 사건의 전말은 5층에 장기 투숙하던 모항공사 직원이 2주일 전 술에 취해 옥상에 있는 물탱크 문을 화장실 문인 줄 알고 잘못 열고 볼일을 보려다 실족해 빠져 죽은 것이었다.
선수들은 그것도 모른 채 2주일이나 시신이 떠 있는 물을 먹고 지낸 것이다.
이날 저녁 손명섭 문정식 코치와 선수들은 여관을 옮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민병대 감독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민병대 감독은 굵은 목소리로 “임자들은 송장 썩은 물을 먹었으니 이제 운수대통했네. 이곳이 명당인데 가기는 어딜 가나”라며 껄껄 웃었다.
여관을 옮기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차범근은 이 일이 있은 뒤 한동안 구역질을 하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