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내 평생 고등학교 선수가 저렇게 잘하는 건 처음 봐. 좌우간 기막히네 기막혀.” 포철 이회택 감독은 탄식하듯 감탄사를 늘어 놓기에 바빴다.
초여름 태양이 유독 따갑던 1988년 7월7일. 제21회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준결승전이 벌어진 효창운동장은 대회 막바지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프로축구 유공과 수원 경기를 앞두고 효창운동장을 찾은 이회택감독은 동대부고 10번 선수인 최문식을 시종 휘둥그래진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최문식은 이날 경기 사작 불과 20초만에 벼락같은 선제골을 터뜨리리더니 후반 10분엔 결승골을 터뜨려 강호 대구공고를 3-2로 꺾는데 가장 큰 공헌을 세웠다. 놀라운 볼 드리블과 천부적인 골 감각, 특히 상대 수비를 등지고 펼치는 스크린 플레이로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를 받아온 최문식이 동대부고에 첫 전국대회 우승의 선물을 안기고 그 자신 MVP로 선정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1월15일 프로위원회에서 열린 1989시즌 드래프트에서 최문식은 3차 지명선수로 포철에 입단, 이회택 감독의 찬사가 그저 감상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역시 드래프트 3번으로 현대에 입단한 창신고 출신의 이효용도 김호 감독의 짝사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1981년 마산 합포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이효용은 창신중 시절부터 소문난 유망주였다. 김호 감독은 이효용을 처음 본 순간 자신과 똑같은 ‘고졸스타’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고 훗날 고백했다. 김호 감독이 동래고 시절 고려대와 연세대 등 명문대학의 스카우트 유혹을 뿌리치고 제일모직에 입단했듯이 이효용도 한양대 제의를 거절하고 현대와 손을 잡은 것이다.
고졸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축구로 직행한 최문식 이효용의 케이스는 “어쩌면 형식일 수도 있는 대학 진학의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하겠다.”는 전진적인 사고였다는 점에서 바람직스러운 ‘사건’으로 일단 평가됐다.
축구협회 김규환 부회장도 “프로축구 정착화에 긍정적이고도 선도적인 예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3개월 후 럭키금성도 통진종고 출신의 수비수 이장욱을 스카우트, 3번 째 고졸 선수 보유 구단으로 등장했다. 이장욱이 최문식 이효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식 드래프트 절차를 밟지 못해 계약금 없이 월봉 50만원의 아마추어 등록했다는 것이다.
1989시즌 이들 ‘고졸 삼총사’의 플레이는 대단했다.
19게임에 출장한 이장욱은 수비수임에도 1골을 기록했고 미드필더 이효용은 14게임 출전, 1골 2도움, 최문식은 17게임에서 6골 1도움의 대활약을 펼쳤다.
고졸선수 성공에 고무된 프로구단들은 1990년 시즌엔 박헌균(안양공고), 김용호(수도공고) 등 6명을 경쟁적으로 스카우트, 고졸선수의 ‘프로 직행 풍속도’는 완전 정착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초여름 태양이 유독 따갑던 1988년 7월7일. 제21회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준결승전이 벌어진 효창운동장은 대회 막바지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프로축구 유공과 수원 경기를 앞두고 효창운동장을 찾은 이회택감독은 동대부고 10번 선수인 최문식을 시종 휘둥그래진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최문식은 이날 경기 사작 불과 20초만에 벼락같은 선제골을 터뜨리리더니 후반 10분엔 결승골을 터뜨려 강호 대구공고를 3-2로 꺾는데 가장 큰 공헌을 세웠다. 놀라운 볼 드리블과 천부적인 골 감각, 특히 상대 수비를 등지고 펼치는 스크린 플레이로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를 받아온 최문식이 동대부고에 첫 전국대회 우승의 선물을 안기고 그 자신 MVP로 선정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1월15일 프로위원회에서 열린 1989시즌 드래프트에서 최문식은 3차 지명선수로 포철에 입단, 이회택 감독의 찬사가 그저 감상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역시 드래프트 3번으로 현대에 입단한 창신고 출신의 이효용도 김호 감독의 짝사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1981년 마산 합포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이효용은 창신중 시절부터 소문난 유망주였다. 김호 감독은 이효용을 처음 본 순간 자신과 똑같은 ‘고졸스타’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고 훗날 고백했다. 김호 감독이 동래고 시절 고려대와 연세대 등 명문대학의 스카우트 유혹을 뿌리치고 제일모직에 입단했듯이 이효용도 한양대 제의를 거절하고 현대와 손을 잡은 것이다.
고졸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축구로 직행한 최문식 이효용의 케이스는 “어쩌면 형식일 수도 있는 대학 진학의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하겠다.”는 전진적인 사고였다는 점에서 바람직스러운 ‘사건’으로 일단 평가됐다.
축구협회 김규환 부회장도 “프로축구 정착화에 긍정적이고도 선도적인 예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3개월 후 럭키금성도 통진종고 출신의 수비수 이장욱을 스카우트, 3번 째 고졸 선수 보유 구단으로 등장했다. 이장욱이 최문식 이효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식 드래프트 절차를 밟지 못해 계약금 없이 월봉 50만원의 아마추어 등록했다는 것이다.
1989시즌 이들 ‘고졸 삼총사’의 플레이는 대단했다.
19게임에 출장한 이장욱은 수비수임에도 1골을 기록했고 미드필더 이효용은 14게임 출전, 1골 2도움, 최문식은 17게임에서 6골 1도움의 대활약을 펼쳤다.
고졸선수 성공에 고무된 프로구단들은 1990년 시즌엔 박헌균(안양공고), 김용호(수도공고) 등 6명을 경쟁적으로 스카우트, 고졸선수의 ‘프로 직행 풍속도’는 완전 정착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