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 박경훈은 왜 MVP 수상 거부했나
입력 : 2013.11.10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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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3월25일 제주도 개막전으로 막을 올린 1988년 프로리그는 올림픽 열기에 따른 상대적 관중 감소, 구장사용 제한과 명색뿐인 지역연고제 등 숱한 악조건을 그대로 지닌 채 진행됐다.

올림픽 경기를 치르는 서울 부산 등 대도시 구장 사용이 불가능해 안양 천안 등을 전전하며 ‘보따리 장사’를 한 이해 프로리그 챔피언은 이회택 감독이 지휘하는 ‘아톰’ 포철이었다.

포철은 올림픽 직후 재개된 프로리그에서 10월15일까지 10승4무7패 승점 24점의 현대 ‘호랑이’에 승점 1점차로 뒤져 2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0월22일 적지인 강릉 맞대결에서 최상국의 결승골로 1-0 으로 현대에 승리, 8승9무4패 승점 25점으로 선두탈환에 성공했다.

11월3일, 대우와의 부산 원정경기에서 시즌 득점왕 이기근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를 낚은 포철은 승점 27점을 기록, 2위 현대의 추격권에서 벗어나며 나머지 경기에 관계없이 우승을 결정지었다. 포철은 1986년에 이어 팀 통산 두 번 째 프로축구 제패였다.

‘지장’ 김호 감독의 진두지휘로 막판까지 포철을 추격한 현대는 마지막 고비에서 좌절, 창단 후 첫 우승의 꿈이 무산됐다.

올림픽축구대표팀의 예선리그 탈락이라는 졸전에도 불구, 1988년 프로리그 후반기 리그는 뜻밖의 열기 속에 진행됐다. 1988년 우승팀 감독을 이듬해 시작되는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출마하는 새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하겠다는 축구협회의 결정이 축구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데 적잖은 힘이 됐다.

포철이 막판 역전 우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일각의 주장 역시 ‘대권 레이스’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이회택 감독을 대표팀 감독에 앉히기 위해 모 팀이 일부러 몇 게임을 져 주는 등 농간을 부렸다는 것인데 이는 확인할 수는 없는 ‘설’로 떠돌았다.

아무튼 우승팀 포철의 이회택 감독은 즉시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돼 향후 2년간 영욕의 교차를 맛보게 되었다.

우승 팀 포철은 11월12일 호텔 신라에서 자축연을 열어 선수단 전원에 월봉 150%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기쁨을 만끽했다.

그런데 마냥 즐거워야 할 자축연장 일각에는 왠지 어색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름 아닌 그해 프로리그 최우수선수(MVP)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 때문이었다.

한국프로축구위원회는 프로리그가 끝난 11월12일 동대문운동장에서 MVP로 포철의 박경훈을 선정 발표했는데 본인은 “자격이 없다.”며 “이 상은 우승에 큰 공을 세운 후배 이기근에 줘야 한다.”고 주장,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박경훈은 동대문운동장 주차장에 세워 둔 팀 전용버스 뒤 쪽에 웅크린 채 MVP 수상을 낯 뜨거워 했다.

더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해 23게임에 주전으로 출전, 12골을 잡아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꾀돌이’ 이기근이었다. 이기근의 골은 대부분이 동점골 또는 역전결승골이어서 수치 이상의 값을 지닌 금싸라기였던 탓에 그의 MVP 선정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구러나 박경훈으로 수상자가 발표되자 이기근은 “축구에 회의를 느낀다.”며 실망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많은 축구전문가들은 ‘터무니 없는’ 수상자 결정을 일제히 성토했으나 프로축구위원회는 “이틀이나 심사숙고한 끝에 MVP를 뽑았다. 수상자를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박경훈의 MVP 시상을 변경하지 않았다.

결국 1988년 MVP 트로피는 수상자에겐 굴욕의 쓴잔이 되었고 우승의 일등공신 이기근에게 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겼다. 끝내 1988년 MVP 트로피는 시상식 때 수여하지 못하고 나중에 어물어물 팀에 전달되는 비운의 트로피가 됐다.

얼토당토 않은 1988년 프로리그 MVP 수상자 선정과 연이어 벌어진 해프닝들은 두고두고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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