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의 老馬之智] '홍명보 스타일'로 브라질전 임해라
입력 : 2013.10.0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64년 전인 1948년 런던 올림픽이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경제도 극도로 어려웠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하계 올림픽에 우리는 이런 열악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참가한 것이다.

축구, 마라톤 등 7개 종목 68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처녀 출전한 우리나라는 당시 경제적 사정으로 보아 올림픽에 선수단을 보냈다는 사실이 지금으로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가 런던까지 갈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포츠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열정적인 지원과 정성 덕분이었다. 우리 축구도 선수 임원 16명이 참가 했다.

1948년 우리축구의 첫 올림픽 상대는 멕시코였다. 우리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5-3으로 승리했다. 세계가 모두 놀랐다. 그다음 스웨덴에게 12-0으로 대패했으나 우리 한국축구는 이미 그 때 세계축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64년이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우리 축구팀은 예선 1차전을 또다시 멕시코와 갖게 되었다. 대등한 아니 우리가 더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아쉽게도 0-0 무승부, 그런데 그 멕시코가 올림픽에서 우승했다. 우리는 영원한 경쟁국 일본을 누르고 귀중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리축구사상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큰 국제대회에의 시상대에 처음 올라간 사건이었다. 2002년 한 일 월드컵에서 4강에 이은 꼭 10년만에 이룬 역사적 쾌거였다. 이 땅에 축구가 들어온지 100년이 넘었지만 처음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던 일을 올림픽 축구팀이 대신한 것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주역이었던 우리 홍명보 지도자가 진두지휘했다. 정말로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선수를 잘 가르치는 것이 좋은 지도자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열정을 갖고 정성을 다해 선수를 지도하는 것이 지도자의 기본적인 자세다. 그렇게 해서 유망한 선수를 키우고 강한 팀을 만들어야 한다.

덕장 밑에서 좋은 선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페어플레이를 할 줄 알고 축구정신을 실천하는 그런 선수가 훌륭한 선수다. 지장은 훌륭한 선수를 키운다. 훌륭한 지도자란 잠재된 자질을 발견하고 그의 능력을 극대화 시키며, 잘못된 생각과 의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선수를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홍명보 지도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축구에 대하여 많이 그리고 깊이 알고 있다. 기술과 전술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실기 이론은 물론 그와 연관된 부문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한 자기 나름의 축구철학이 확립되어 있다. 즉 축구를 어떻게 보고 있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축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등, 축구에 관하여 갖고 있는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다고 본다.

승패는 패스위주의 축구 조직력 강화와 지도자의 축구 관에 의한 작전, 전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확고한 축구철학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축구스타일, 전술, 선수관리, 팀 운영 등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선수는 나름대로 개성이 있다. 주역은 선수다. 지도자는 지도자 일 뿐이다. 성과를 올리는 주역은 선수 즉 멤버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다르다. 개성의 평가가 중요하다. 인간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항상 자신은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한 가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재능은 속이지 않는다. 선수의 기능을 높이어 경기운영에 잘 연결시켜야 한다.

특히 외국에서 활동하는 선수와 국내선수는 생각과 생활환경이 다른 면이 많다. 이들을 프로세스에 최고의 기능과 자질을 발휘시켜 최대의 효과를 창조하는 팀을 만들어야 한다.

홍명보 지도자는 자신의 스타일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 자기 스타일로 실행이 안 된 경기는 승리 할 수 없다. 자신감을 가지고 승리 스타일로 경기에 임하는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 홍명보 지도자의 쾌거를 기대한다.

글쓴이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1958년 대표선수로 활약했으며 제1회아시안컵 우승 멤버다. 1969년 모교인 경희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한양공고 건국대 육사 서울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일본 오이타 클럽 기술고문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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