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대구, 손찬익 기자] 주저앉았던 선수가 보란 듯이 재기하는 것만큼 팬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스토리는 없다. 한국 프로야구는 ‘재기상’을 공식 시상하지 않지만 아픔을 겪었던 선수들의 부활은 리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재기상이 있다면 삼성 라이온즈 외야수 김헌곤도 유력 후보 중 한 명이다.
2022년과 2023년 부상과 부진 속에 힘겨운 시간을 보낸 김헌곤은 올 시즌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19일 현재 54경기 타율 3할6리(124타수 38안타) 6홈런 18타점 22득점 2도루를 기록 중이다. 허리 통증으로 쉼표를 찍긴 했지만 팬들 사이에서 ‘대헌곤’이라고 불릴 만큼 팀의 상승세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20일 대구 SSG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김헌곤은 마치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하루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무언가를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예전 같으면 공을 치고 나서도 신경을 썼다. 왜 잡혔을까 하는 아쉬움에 사로잡혔는데 그건 제 영역이 아니었다. 제가 수비를 방해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결과에 연연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잘 된다고 너무 들뜨지 않고 운이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 김헌곤의 말이다.
좌완 베테랑 백정현의 진심 가득한 조언은 김헌곤에게 큰 힘이 됐다. 백정현은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했을 뿐인데 (김)헌곤이가 좋게 이야기해준 것”이라고 자신을 낮췄지만 김헌곤에겐 깊은 울림을 안겼다.
김헌곤은 “제가 힘들 때 정현이 형에게 ‘제 생각대로 안 된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러자 정현이 형이 ‘다 좋은 일도, 다 나쁜 일도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어떤 의미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늘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백정현의 한마디가 김헌곤에게 큰 울림을 안겨줬듯 김헌곤 또한 팀내 젊은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에 “특별한 건 없다.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선수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야구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최대한 빨리 좋은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김헌곤은 또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제가 저 나이 때 저만큼 했었을까 싶다. 잘 해내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신기하다”고 환히 웃었다.
2011년 데뷔 후 원클럽맨으로 활약 중인 그는 “제가 지난해 팀을 위해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야구를 그만둘 뻔했는데 다시 기회를 얻게 됐고 우리 팀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고 했다.
이어 “팀이 잘 되는 게 우선이고 그러기 위해 젊은 선수들이 잘해야 한다. 젊은 선수들이 잘할 수 있도록 제가 힘을 보태는 게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못하면 당연히 유니폼을 벗어야 한다.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고 어떻게 해서든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해”라고 덧붙였다.
까까머리 시절부터 주장 구자욱(외야수)을 지켜봤던 김헌곤은 “어릴 적부터 봤으니까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열심히 한다. 저도 짧게나마 주장을 해봤지만 혼자 하기엔 벅차고 신경 쓸 게 정말 많다. 잘 해내는 걸 보면 정말 대견하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꼭 도움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헌곤의 올 시즌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한 번 아파서 내려갔을 때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아프지 않고 시즌 끝까지 동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좋은 선수 이전에 좋은 사람인 김헌곤다운 대답이었다.
김헌곤은 20일 SSG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3-0으로 앞선 8회 무사 1,3루 찬스에서 대타로 나섰다. SSG 소방수 문승원을 상대로 좌전 안타를 때려 3루 주자 박병호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승부를 결정짓는 짜릿한 한 방이었다. 삼성은 SSG를 4-0으로 꺾고 주중 3연전을 2승 1패로 마감했다. /what@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