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 권해효의 오열, 흔한 인간의 이기심이 부른 파국 [김재동의 나무와 숲]
입력 : 2024.09.08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OSEN=김재동 객원기자] MBC 금토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의 원작은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본이 참 잘 빠졌다는 느낌이다. 사건의 얼개는 중반 넘어가며 번연해졌지만 그 전개를 따라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음습한 감정들, 시기, 질투, 이기심, 나약함 등이 그때그때 제대로 긁혀나오며 텐션을 유지하고 있다.

가령 7일 방송된 8회에서 유치장 안의 양병무(이태구 분)는 고정우(변요한 분)에게 해묵은 시기심을 드러낸다.

“착한 척, 멋있는 척.. 옛날부터 이 재수없는 새끼. 공부에, 운동에, 돈 많은 집안에, 좋은 부모까지. 넌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차원이 달랐어. 내가 그 낡아빠진 운동화 신고 볼 찬다고 깝죽대고 있을 때 너는 축구할 때는 축구화, 농구할 때는 농구화, 야 병무야, 체육대횐데 아빠가 새 신발 안사주셨어?.. 너랑나랑은 출발점이 다르다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난 니 따까리였잖아.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먹겠다고 쫄래쫄래 따라다녔던 니 따까리.”

“그래 그렇다고 치자. 재수없고 밥맛 떨어지는 새끼였다고. 근데 보영이는 아니었잖아 보영이는 그냥 친구였잖아. 병무야. 너 보영이 좋아했잖아. 왜 그랬어?”

“지랑 나랑 같은 처지면서 니 편 들잖아. 다 너 때문이야!”

학창시절 양병무에게 고정우는 좋은 친구였을 것이다.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유쾌하고, 차별 두지 않고, 한창 배고플 나이에 구애없이 간식도 조달했던, 함께 걷기에 자랑스러운 친구였을 것이다. 동시에 부러운 친구였을 것이다. ‘나도 정우 같았으면’ ‘나도 정우같은 부모 만났으면’ 싶은.

그 정우랑 함께 하다 보니 어느덧 의견은 정우가 내고 자신들은 따르는 모양새가 됐을 것이다. 은연중 정우의 졸개가 된듯한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패감을 애써 우정으로 포장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꽁꽁 숨겨두었던 제 안의 열등감을 파헤친 심보영(장하은 분)이 잘못한 것이다. 애시당초 그런 맘을 품게 한 고정우가 잘못했다고 우기고 싶을 것이다.

보영모 이재희(박미현 분) 얘기도 들어보자. “열아홉에 보영이 임신하고 집에서 쫓겨나 엉엉 울면서 무천바닥 돌아다닐 때 집에 데려가서 밥 먹이고 재워준 사람이 니 엄마야. 만삭의 몸으로 서울로 도망간 보영이 아버지 끌고 내려와서 살림집 차려준 것도 금희 언니, 니 엄마고. 내 평생의 은인인데 니가 보영이 죽이고 10년 동안 그냥 죽이고 싶은 년이었어. 죄송하다 죄송하다 바닥을 기면 뭐해. 니 엄마 숨소리만 들어도 내 가슴에서 이런 게 솟구치는데.”

이재희는 정금희(김미경 분)가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그만큼 부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제 바닥을 다 지켜본 정금희가 거북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여전히 고마웠을 것이다. 그런데 딸이 죽었다. 죽인 자가 정금희 아들이란다. 하지만 이재희 본인만은 안다. 제 불륜이 아녔다면, 그래서 뛰쳐나간 심보영이 밖으로 돌지 않았다면 안죽었으리란 걸.

누구에게도 말 못할 그 죄책감이 너무 무겁다. 혼자 짊어지기엔 감프다. 정금희가 평생의 은인인건 분명하지만, 그리고 죄없음도 알지만, 무조건 죄가 있어야 한다. 바닥을 기며 죄송하다 죄송하다 사죄해도 용서할 수 없다.

보상으로 내놓은 정금희 돈으로 심보영 살아 생전 소망했던 보영방을 꾸민 집도 마련했겠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다. 제 안의 죄책감이 태산 같은데 정금희마저 용서해 버리면 이재희 본인은 깔려 죽겠기 때문이다.

신민수 아버지 신추호(이두일 분)나 양병무 아버지 양흥수(차순배 분)는 어떤가. 제 아들들이 심보영을 해코지한 사실을 안다. 청천벽력이지만 천만다행인게 형사과장 현구탁(권해효 분)의 아들 현건오(이가섭 분)도 같이 있었단다. 제 아들조차 연루된 사건인 터라 현구탁이 발빠르게 손을 써 고정우가 범인으로 낙점됐다.

그렇게 고정우를 살인범으로 몰기로 했다. 동네 선배로서 술 사고 밥 사먹이면서 심보영의 아버지 심동민(조재윤 분)을 위로했다. 물론 말 못할 미안함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게중 악랄한 건 신추호(이두일 분). 무천가든 사장 고창수(안내상 분)에게 선배대접 톡톡히 받던 주방장 신추호는 제가 받았어야 할 고통으로 경황없는 고창수로부터 무천가든을 헐값에 인수받아 사장이 되기도 했다. 정금희를 주방이모로 부리면서도 심동민이 천대하는 모습을 방관하며 즐기기도 했다.

고정우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현구탁은 어떤가. 제 아들이 연관된 살인사건이다. 제가 수사할 사건이다. 아들 혼자 뺄 수 없다. 양병무, 신민수도 같이 빼야 한다. 그러자니 고정우만 남는다. 마침 친구 내외는 해외여행 중이라 알리바이도 없다.

할 수 없다. 고정우가 범인여야 한다. 미안하지. 미안한데 어쩔 수 없다. 제 아들 호적에 빨간 줄을 그을 순 없다. 근데 그 아들이 마음이 여려 불안하다. 바로 미국으로 떠나보냈다.

고정우가 출소했다. 옛날 사건을 들쑤신다. 하지만 이제와서 뭘 어쩔 수 있을까. 억울하겠지만 형기도 마친 마당이다. 잊고 살라고 종용도 해보지만 요지부동이다. 급기야 심보영의 유골사체까지 찾았다. 그리고는 재수사를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아들 현건오가 돌아왔다. 알콜릭이 된 채.

그리고 현건오가 감춰둔 유류품에서 심보영의 핸드폰과 속옷이 나왔다. 노상철(고준 분)이 들이밀며 재수사를 요구한다. 심보영 속옷에선 양병무, 신민수의 DNA만 나왔고 동영상 속에서도 현건오는 현장을 벗어났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사체유기. 신추호와 양흥수는 다 까발린다고 협박한다. 다 끝난 사건이다. 고정우는 억울하겠지만 어차피 형기다 다 채운 터다. 이 사건으로 누군가가 다시 형벌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사람 다루는데 이골이 난 현구탁은 형사과장 김희도(장원영 분)를 불러 들인다.

“그렇다면 혹시 심보영이 죽인 것도 걔네들일까? 그때 우리가 뭔가 수사를 잘못한 것 아니었을까?”

서장이 물어왔을 때 김희도는 생각했다. 수사를 잘못하다니. 서장까지 달아보자면 이력에 흠집 나면 안된다. “아닙니다. 고정우가 죽인 겁니다. 저 동영상 심보영이 살아있을 때 심보영이 직접 촬영한 겁니다. 그 후에 건오는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 들었고 신민수 양병무는 망자를 성폭행했고 그 뒤로는 아마 겁이 나서 달아났을 겁니다. 그후 고정우가 술이 취해서 창고로 들어왔고 성폭행 충격으로 창고를 나가지 못한 심보영을..”

말이 막히는데 서장이 거든다. “그래. 그렇다면, 만약 고정우가 박다은이랑 함께 창고에 들어왔다면?” 그렇지. 그랬겠네. “예, 맞네요. 그러다가 셋이 말다툼이 있었고 심보영, 박다은을 살해한 거라면? 하!” 딱 맞아떨어지잖아. 서장도 탁자를 치면서 공감한다.

“그래. 근데 이게 무슨 확실한 증거가 없잖아. 물론 우리 김과장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그 예리한 직감 내가 잘 알지. 게다가 이미 고정우는 형을 마친 상태고. 상황이 참...” 서장은 재수사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게 재수사의 명분이 없는 겁니다. 이게.”

서장이 영상 담긴 핸드폰과 감식 결과를 가리키며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걸 갖고 증명할 수 있는 게 뭐야?”

답은 뻔하지. “단순 성폭행으로 처리하면 되겠네요.” 이게 맞지. 고정우란 놈 괜히 들쑤셔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잖아. 성폭행이면 공소시효 따지고 뭐 따지면 양병무들도 금방 풀려나겠네. 이렇게 정리되는 게 맞지.

김희도는 그렇게 속 편히 결론 냈지만 현구탁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아들 현건오가 증언을 하려 한다. “그냥 우리 수오 생각해서라도 한번만 넘어가면 안돼?” 애원해도 요지부동이다. 별 수 없이 수오와 영상통화를 시켜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우리 수오는 누가 돌봐주냐?” 제 쌍둥이 형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 여린 아들은 끝내 위증을 했다. 그렇게 잘 끝났는 줄 알았는데..

아들 건오로부터 걸려온 전화. 일러준대로 11년 전 사건현장인 정우네 창고로 달려갔을 때 건오는 거기에 있었다. 들보에 목을 매단 채로.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타고난 악당이 하나 없다.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야비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너 같고 나 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 내면엔 호의를 팽개치고, 우정에 침을 뱉고, 급기야 누구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결국 제 자신까지 파국으로 내모는 괴물같은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시청자를 섬뜩하게 만들며 드라마의 서스펜스를 감당하는 추동력이다.

/zaitung@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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