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정성래 기자=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경력에 레알 마드리드가 없다는 것은 무언가 하나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인터밀란에서의 화려한 성공을 뒤로하고 호기롭게 레알의 감독직에 앉았던 무리뉴. 그가 3년만에 레알의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그가 레알의 지휘봉을 잡았던 세 시즌 간 그가 이룬 공과는 무엇일까.
’갈락티코’의 종식
무리뉴는 2010/2011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 인터밀란에서 트레블에 성공한 뒤 레알의 감독직에 올랐다. 그는 부임과 함께 팀의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레알은 그의 부임 전인 2009년 ‘갈락티코 2기’를 결성했다. 라울 알비올, 카림 벤제마, 사비 알론소, 카카와 호날두를 영입하며 엄청난 이적 금액을 투자했다. 하지만 무리뉴는 레알에서의 첫 훈련을 마치고 “영입에 비해 선수들의 성과가 부족하다. 선수단의 밸런스도 맞출 필요가 있다”며 갈락티코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후 선수의 이름값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는 화려한 개인 플레이보다는 조직적인 팀 플레이를 중시했고, 이에 맞는 선수들을 찾았다. 무리뉴는 메수트 외질, 앙헬 디 마리아, 파비오 코엔트랑, 사미 케디라 등 능력 있는 선수들을 레알에 데려왔고, 이들은 레알의 주축 선수로 성장하며 무리뉴 감독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레알 개혁의 선봉장
레알은 전통적으로 회장과 단장의 입김이 감독을 지배하는 ‘구단 중심의 팀’이었다. 레알의 수뇌부는 팀이 조금만 부진한 모습을 보여도 참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감독들을 경질했다. 하지만 무리뉴는 쉽게 경질됐던 다른 감독들과 달랐다. 그는 레알의 개혁을 주장했고,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무기로 페레스 회장을 설득시켰다. 결국 무리뉴 감독은 구단의 전권을 쥐고 흔들었던 호르헤 발다뇨 단장과의 ‘파워게임’에서 승리했다. 발다뇨 단장은 단장직을 내려놓았고, 무리뉴 감독은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방식대로 팀을 운영할 수 있는 전권을 쥐게 됐다.
징크스의 종결, 그리고 승점 100점
2004/2005시즌을 시작으로 레알은 무려 6년간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무리뉴 감독에게 16강은 너무나 쉬운 무대였다. 2010/2011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리옹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상대는 그 전까지 레알이 이겨보지 못했던 프랑스의 올림피크 리옹이였다. 무리뉴는 레알의 ‘16강 징크스’와 ‘리옹 징크스’를 단숨에 깨뜨렸다.
무리뉴 감독은 2011/2012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영원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뒤로 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레알은 32승 4무 2패, 121골 32실점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승점 100점의 위업을 달성했다. 승점 100점은 유럽의 4대 리그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와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위대한 기록이다.
강한 리더십, 그 속에 감춰진 아집
무리뉴는 자신의 철학을 믿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리더십을 선보이는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따라오지 않는 선수들을 가차없이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이케르 카시야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 모두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절대적인 골키퍼’였다. 하지만 무리뉴는 팀 내 분위기를 해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카시야스를 지목했고, 둘 사이의 불화는 심각하게 이어졌다.
무리뉴 감독은 카시야스의 능력에도 의문을 품었고, 그가 손가락 골절 부상을 당하자 대체 자원인 디에고 로페스를 영입했다. 로페스의 뛰어난 선방에 무리뉴는 카시야스의 복귀 후에도 그를 벤치에 앉히는 결단을 내린다.
레알에서의 무리뉴 리더십은 ‘반쪽’이었다. 그는 팀이 좋은 모습을 보일 때는 뛰어난 리더십을 선보였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부진할 때의 선수단 장악력은 아쉬운 모습이었다. 무리뉴 감독은 카시야스 이외에도 페페와도 불화를 일으키며 선수들과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레알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사진=ⓒJavier Garcia/BPI/스포탈코리아
’갈락티코’의 종식
무리뉴는 2010/2011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 인터밀란에서 트레블에 성공한 뒤 레알의 감독직에 올랐다. 그는 부임과 함께 팀의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레알은 그의 부임 전인 2009년 ‘갈락티코 2기’를 결성했다. 라울 알비올, 카림 벤제마, 사비 알론소, 카카와 호날두를 영입하며 엄청난 이적 금액을 투자했다. 하지만 무리뉴는 레알에서의 첫 훈련을 마치고 “영입에 비해 선수들의 성과가 부족하다. 선수단의 밸런스도 맞출 필요가 있다”며 갈락티코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후 선수의 이름값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는 화려한 개인 플레이보다는 조직적인 팀 플레이를 중시했고, 이에 맞는 선수들을 찾았다. 무리뉴는 메수트 외질, 앙헬 디 마리아, 파비오 코엔트랑, 사미 케디라 등 능력 있는 선수들을 레알에 데려왔고, 이들은 레알의 주축 선수로 성장하며 무리뉴 감독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레알 개혁의 선봉장
레알은 전통적으로 회장과 단장의 입김이 감독을 지배하는 ‘구단 중심의 팀’이었다. 레알의 수뇌부는 팀이 조금만 부진한 모습을 보여도 참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감독들을 경질했다. 하지만 무리뉴는 쉽게 경질됐던 다른 감독들과 달랐다. 그는 레알의 개혁을 주장했고,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무기로 페레스 회장을 설득시켰다. 결국 무리뉴 감독은 구단의 전권을 쥐고 흔들었던 호르헤 발다뇨 단장과의 ‘파워게임’에서 승리했다. 발다뇨 단장은 단장직을 내려놓았고, 무리뉴 감독은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방식대로 팀을 운영할 수 있는 전권을 쥐게 됐다.
징크스의 종결, 그리고 승점 100점
2004/2005시즌을 시작으로 레알은 무려 6년간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무리뉴 감독에게 16강은 너무나 쉬운 무대였다. 2010/2011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리옹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상대는 그 전까지 레알이 이겨보지 못했던 프랑스의 올림피크 리옹이였다. 무리뉴는 레알의 ‘16강 징크스’와 ‘리옹 징크스’를 단숨에 깨뜨렸다.
무리뉴 감독은 2011/2012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영원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뒤로 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레알은 32승 4무 2패, 121골 32실점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승점 100점의 위업을 달성했다. 승점 100점은 유럽의 4대 리그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와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위대한 기록이다.
강한 리더십, 그 속에 감춰진 아집
무리뉴는 자신의 철학을 믿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리더십을 선보이는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따라오지 않는 선수들을 가차없이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이케르 카시야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 모두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절대적인 골키퍼’였다. 하지만 무리뉴는 팀 내 분위기를 해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카시야스를 지목했고, 둘 사이의 불화는 심각하게 이어졌다.
무리뉴 감독은 카시야스의 능력에도 의문을 품었고, 그가 손가락 골절 부상을 당하자 대체 자원인 디에고 로페스를 영입했다. 로페스의 뛰어난 선방에 무리뉴는 카시야스의 복귀 후에도 그를 벤치에 앉히는 결단을 내린다.
레알에서의 무리뉴 리더십은 ‘반쪽’이었다. 그는 팀이 좋은 모습을 보일 때는 뛰어난 리더십을 선보였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부진할 때의 선수단 장악력은 아쉬운 모습이었다. 무리뉴 감독은 카시야스 이외에도 페페와도 불화를 일으키며 선수들과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레알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사진=ⓒJavier Garcia/BPI/스포탈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