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스코츠데일(미국 애리조나주), 이상학 기자]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바람의 아들과 손자가 만났다. 월드시리즈 우승 4회에 빛나는 ‘명장’ 브루스 보치(69)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의 특별한 배려 속에 이종범-이정후 부자가 미국 야구장에서 조우했다.
지난달 19일(이하 한국시간) 텍사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는 이종범(54) 코치는 2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미국 애리조나주 서프라이즈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지에 아침 일찍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달랐다. 보치 감독이 이 코치를 불러 “메이저리그 경기도 봐야 한다”며 이날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 원정 동행을 알린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이 코치의 아들인 이정후(26)가 있다. 그라운드에서 부자 상봉을 위한 텍사스 구단과 보치 감독의 특별 배려였다.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이 코치를 물심양면으로 지원 중인 케니 홈버그 수비 코디네이터도 중간에서 도움을 줬다.
지난달부터 캠프 기간 이종범-이정후 부자는 스코츠데일에 집을 구해서 같이 살고 있지만 서로 출근지가 달라 야구장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 이 코치의 이날 경기 동행은 경기를 준비하던 이정후도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깜짝 이벤트. 보치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코치에게 경기 전 라인업 카드 교환도 맡겼다. 이 코치가 “배려해줘서 감사하다”고 하자 보치 감독은 “오늘은 당신이 감독이다”며 농담으로 웃으며 화답했다.
경기 전 이 코치는 “보치 감독과 여러 대화를 나눴다. 보치 감독도 작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고, 나도 한국에서 (LG 코치로) 우승했다고 얘기하니 ‘여기 왜 왔냐?’고 하더라. 그래서 아들 때문에 왔다고 하니 웃더라”며 미소를 지었다. 보치 감독도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야구장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특별한 경험은 없을 것이다”며 흐뭇해했다. 이정후 역시 “텍사스 구단이 배려를 해주셔서 아빠가 온 것 같다. 한국에서도 야구장에서 만났지만 미국에선 처음이라 느낌이 다르다.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아빠를 만나게 돼 신기하다”며 기뻐했다.
아내 정연희 씨와 함께 미국에 온 이 코치는 아들 이정후의 미국 적응을 돕기 위해 LG 트윈스 코치직을 관뒀다. 하지만 ‘천생 야구인’으로서 이번 기회에 미국 야구 공부에 나섰다. 이정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구단 대신 다른 팀을 알아봤다. 직접 이력서를 넣어 애리조나에 캠프를 차린 팀 중에서 연수할 곳을 찾았고, 텍사스에서 기회를 얻어 선진 시스템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이날은 구단의 배려 속에 시범경기 원정에도 동행했고, 아들 이정후와 서로 유니폼을 입고 만났다. 이정후는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 출신 우완 선발 애드리안 샘슨 상대로 1회 중견수 뜬공, 3회 3루 파울플라이로 물러났지만 5회 콜 윈에게 투스트라이크 불리한 카운트에서 95마일(152.9km)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중전 안타로 연결하며 아버지를 흐뭇하게 했다.
이정후의 시범경기 데뷔 3경기 연속 안타. 지난달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데뷔전에서 첫 타석부터 안타를 치고 나가며 3타수 1안타 1득점로 스타트를 끊은 이정후는 1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첫 2루타에 홈런까지 신고하며 3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으로 활약했다. 이날까지 전체 성적은 타율 4할4푼4리(9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홈런을 친 애리조나전은 따로 TV 중계가 되지 않았지만 소속사를 통해 이정후의 타격 영상을 모두 챙겨본 이 코치는 “한국 시절과 비교해 치는 것에 있어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더 심플해진 것 같다”며 “나도 일본에 진출했을 때 경험을 해봤지만 새로운 곳에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클 것이다. 불안감도 있을 텐데 여러모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아들을 대견해했다.
이종범-이정후 부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 보치 감독에게도 이날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난 2007~2019년 13년간 샌프란시스코 감독으로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2010·2012·2014년)을 이끈 친정팀의 캠프 구장을 방문한 것이다.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을 메운 팬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로 환영했고, 보치 감독은 모자를 벗어 화답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감독 은퇴를 선언했던 보치 감독은 지난해 텍사스의 부름을 받고 현장에 복귀했다. 부임 첫 해부터 팀을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명장’ 명성을 재확인했다. 1995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그는 26시즌 통산 4194경기를 지휘하며 2093승2101패(승률 .499)를 기록 중이다. 정규시즌 승률은 5할이 되지 않지만 포스트시즌 통산 94경기 57승37패(승률 .606)로 단기전에 강한 승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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