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합정, 연휘선 기자]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통역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적국의 장수들끼리 도대체 어떻게 싸웠을까. 문답무용의 상황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그럼에도 말을 전하는 캐릭터가 '전, 란'에서 탄생했다. 다리가 잘려도 할 말 다 하는 통역으로 웃음을 선사한 '전, 란'의 진 주인공이 된 남자. 배우 고한민이다.
고한민은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전, 란'(감독 김상만)에서 왜군 통역사 소이치로 역을 맡아 활약했다. 왜장 겐신(정성일 분)과 조선의 노비 의병 천영(강동원 분) 사이 박진감 넘치는 전투, 그 칼날 사이 소이치로의 화려한 언변이 웃음을 자아냈던 바. "조선 파파고"라는 '밈'을 만들어낸 그를 23일 오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OSEN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전, 란'은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 분)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 분)이 선조(차승원 분)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한국 영화계 거장 박찬욱 감독이 제작하고, 그가 인정한 천재 감독 김상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데다 박정민, 강동원, 차승원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의 만남으로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에 힘입어 최근 치러진 '제 29회 부산국제 영화제(약칭 부국제)'에서 '전, 란'이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한 바. 현장을 찾은 관객들의 웃음보를 터트린 존재가 있었다. 바로 통역사 소이치로. 왜장 겐신과 천영의 사이에서 칼을 들고 죽는 순간까지 통역을 한 그의 모습이 무거울 줄 알았던 영화에 경쾌함을 더하며 윤활유가 됐다.
급기야 '조선 파파고'라는 말까지 들으며 '전, 란'의 첫 감상평으로 고한민의 소이치로가 꼽히는 상황. "이렇게까지 관심 가져주실 줄 몰랐다"라며 얼떨떨해 한 고한민은 "진선규 형 한 마디 '한민아, 그냥 해 봐'라는 응원이 정말 큰 힘이 됐다"라고 고마움을 밝혔다.
그는 "소이치로가 원래 조선인인데 부산에서 왜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일본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7년 동안 전쟁을 거치면서 겐신의 충신이 돼 일본 이름까지 받았다는 설정이다. 어떻게 보면 '친왜인', '매국노'라 욕을 많이 먹을 줄 알았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원래 처음 설정에는 이렇게까지 자세히 정해지진 않았다. 그냥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통역이라는 설정만 있었다. 그런데 리딩을 하면서 조선인 출신이 통역을 하는 것으로 점차 명확해졌다"라고 덧붙였다.
특히 고한민은 "첫 대본 리딩 현장에서 원래는 제 대사가 없었다. 동원이 형, 정민 씨, 성일이 형 사이에서 '소이치로가 통역을 한다' 정도만 있었다. 일본어 중에서도 고어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 일본어 대사 자체가 픽스가 나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가 원래 일본어를 할 줄 안다. 그래서 리딩 때 현대적인 일본어고 간사이 사투리이지만 이렇게라도 말을 전하면 좀 현장감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 때 선규 형이 '한민아 그냥 해 봐'라고 응원을 해주셔서 용기내서 첫 리딩 때 통역을 옮겨봤고, 좋은 반응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이에 그는 "선규 형은 정말 천사다. 실제 작품에서 김자령(진선규 분) 의병장의 모습이 여태까지 형이 맡아온 작품 중 가장 선규 형과 닮았을 거다. 선규 형이 저한테는 최고의 롤모델이자 고마운 형이다. '개들의 전쟁' 때부터 계속해서 형이 저를 힘들 때마다 이끌어줬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선규 형이 '전, 란'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를 뽑고 있다면서 저를 추천을 했으니 오디션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해줬다. 사실 배우가 배우를 추천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형의 마음이 고마워서 또 제가 준비해온 걸 보여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잘하고 싶어서 할 줄 아는 일본어로 켄신 대사를 준비해서 오디션을 봤다. 그걸 좋게 봐주신 것 같다"라고 털어놨다.
고한민은 "다들 아시겠지만 무명 배우들은 끝이 안 보이는 길을 계속 간다. 끝이 보이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갈 수 있겠지만 끝 없는 길의 막막함, 보이지 않는 길이 언제까지 계속 된다는 게 쉽지 않다. 그렇게 좌절할 때마다 선규 형이 저를 건져 올려줬다. '한민아 다 왔어, 조금만 힘내자, 형도 이렇게 됐는데 나보다 더한 너는 더 잘 될 거야'라는 응원이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고 응원이 됐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캐릭터 특성상, 고한민은 '전, 란' 촬영에서 정성일과 가장 많은 시간 호흡을 맞췄다. 그는 "성일이 형을 따라다니면서 말 끌어주고, 싸우는 척 하면서 도망가고, 투항할 때도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라고 웃으며 "콘티에 있거나 시켜서 했다기 보다는 이 인물로 뭘 잘할 수 있을까를 조금 더 열어두고 준비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현장에서 성일이 형이 도움을 많이 주셨다"라며 고마움을 밝혔다. 이어 "형이랑 일본어 공부를 같이 했다. 수업도 같이 듣고, 저는 원래 할 줄 아니까 형이 많이 의지가 되기도 하고, 대사 준비한 걸 말하면서 '이렇게 해볼까요?'라고 하면 '너무 좋은데? 해볼까?'라고 열어두고 해주셨다. 그런 부분들이 정성일 배우랑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에 고한민은 "'전, 란'에 천영과 종려의 씬, 의병들의 씬이 있었다면 저는 겐신과 둘만 있는 과정이 많았다. 같이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작품에 더 많이 녹아나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그는 정성일에 대해 "제가 사실 어느 현장에서도 모니터 뒤에 쭈뼛거린다. 아직은 조심스럽고. 그러면 항상 의자를 갖고 와서 형 옆에 앉으라고 하면서 모니터를 보면서 같이 보여주셨다. 다음에 어차피 저희가 같이 앵글에 들어가야 하니 같이 보자면서. 밥 먹으러 갈 때에도 이제 주연 배우들이 있으면 항상 저랑 같이 데리고 가서 같이 먹으면서 챙겨주셨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한민은 "성일이 형과 제가 같이 무명 때부터 연예인 야구단에 있었다. 이렇게 현장에서 형은 장수, 저는 부하 역할로 만나니까 아무래도 남달랐다"라며 "아무래도 연극배우 선배들이라 전배수 형도 그렇게 가면 단역들을 챙긴다. 저를 포함해서. 현장만 가면 진선규, 정성일, 전배수 이런 배우들이 자기 스태프 챙기듯이 챙겨줘서 휴차 때도 항상 지방에 같이 머물렀는데 같이 밥을 먹는 시간도 행복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진선규의 응원과 정성일의 격려 속에 다듬으며 만들어낸 '조선 파파고' 소이치로. 김상만 감독의 연출로 빛난 장면들도 있었다. 고한민은 "소이치로가 본인이 유리한 상황에서는 조선인에게 반말로 통역을 하고, 불리할 때는 존댓말을 써가면서 통역을 한다. 그런 톤의 변화도 그렇고 천영과 겐신이 싸울 때와 같이 화면에 담기지 않는 순간에도 카메라 밖에서 통역을 하고 있도록 알려줄 수 있게 됐다. 확실히 감독님이 잘 넣어주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의 참여에 대해 "'전, 란'이 촬영될 때 박찬욱 감독님이 해외에서 다른 작품을 작업 중이셨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저는 대본 리딩 같을 때는 뵙지는 못했는데, 나중에 대본 리딩 장면을 영상으로 다 보셨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통역사 역할을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조언을 해주셨다고 들었다"라고 전했다.
고증은 얼마나 반영된 것일까. 고한민은 "사실 진짜 전장에 저렇게 따라다니는 통역이 있을까 싶다"라고 웃으면서도 "제가 찾아본 자료로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 전장에 통역이 있었다는 자료는 있었다. 그런데 실제 '전, 란' 속 소이치로처럼 전투 현장까지 쫓아다녔을 정도인지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김상만 감독님과 박찬욱 감독님의 상상이 더해진 연출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실제로 소이치로의 마지막은 원래는 다리가 잘리면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내 다리 가져와!'라며 화살을 맞고 죽는 깔끔한 최후까지 만들어주셨다"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 저는 '매국노'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라며 "그런데 '조선 파파고'라고 불러주시고 네이버에 '전, 란' 관람평을 검색하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통역사다'라는 반응이 제일 먼저 올라와 있고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셨다. 넷플릭스 측에서도 '조선 파파고'라는 숏츠까지 만들어주셨다"라며 놀라워 했다. 이에 제일 기억에 남는 반응으로 '조선 파파고'를 꼽기도.
'전, 란'을 통해 '조선 파파고'로 불리기까지, 고한민은 18년의 무명 생활을 버텼다. 초등학생부터 배워온 태권도로 선수생활까지 했으나 군복무 중이던 병장 말년, 무릎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연기자로 전향했다. 이후 대학로에서 무대 경험을 쌓으며 긴 시간 조단역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아내를 만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까지 낳았다. "아내가 한 번도 바가지 긁지 않고 제 꿈을 응원해주고 열심히 일을 해줬다"라며 눈가가 촉촉해진 그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제가 배우로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네에서 딸들을 만날 때도 항상 환하게 웃으며 '아빠!'하고 달려와 안아준다"라며 애틋함을 표했다.
기실 '전, 란'에 앞서 고한민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우씨왕후'에서 우희(전종서 분)를 쫓는 흰호랑이족 2인자 파야 역으로도 활약했다. 아쉽게도 '우씨왕후'와 '전, 란'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 아직 초등학생인 딸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지만 자신의 일부 장면이라도 보여주며 함께 기뻐했다고. 이에 고한민은 "'우씨왕후' 제작진 분들이 감사하게도 제가 주연도 아닌데 주요 인물들 포토카드를 만들 때 파야도 함께 만들어서 또 두 장이나 전해주셨다. 요새 어린 아이들이 아이돌 포토카드를 모으는 일이 많은데 저희 딸들 포토카드 맨 앞 장에 제 포토카드가 있게 됐다"라며 웃었다.
'전, 란'을 통해 일본에 있는 그의 모친도 아들의 작품을 접했다. 고한민의 모친은 현재 일본 오사카에서 거주 중이다. 어린 시절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모친이 생계를 꾸리려 과감한 결단을 내려 일본으로 향했고, 이에 고한민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모친이 있는 오사카를 방학마다 넘나들며 일본어를 익혔다. '전, 란'이 글로벌 OTT 플랫폼 넷플릭스 공개작인 만큼 일본에서도 모친이 지인들과 아들의 작품을 시청하고 함께 기뻐했다고.
이에 고한민은 "18년 동안 많은 작품, 많은 단역을 했다. 이 작품을 통해서 하루 아침에 달라지고 드라마틱한 건 없지만 정말 내가 그동안 준비를 해왔던 걸 사람들이 조금 봐주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너무 감사했다"라며 웃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 지금도 무명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난 과정들은 더 힘들었다. 되게 많이 힘들었는데 앞으로가 더욱 중요한 것 같다"라며 "항상 모든 게 달리기 같았으면 좋겠다. 달리기는 한 만큼 나온다. 배우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누군가 손대지 않으면 빛을 못 보는 사람도 있고. 제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이유도 골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단련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골인까지 과정 중에 잠깐 넘어졌다 일어나는 거라고, 선규 형 말처럼 다 왔다고 생각하며 더욱 버티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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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OSEN 민경훈 기자, 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