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롯데의 강민호’ 시대가 마감되었다. 강민호는 지난 21일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의 제안을 뿌리치고 삼성 라이온즈와 4년 총액 80억원에 계약하며 데뷔 14년 만에 타 팀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번 계약이 많은 팬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강민호는 롯데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장한 선수이다(1,495경기 / 2위 김응국 1,454경기). 그는 페넌트레이스뿐만 아니라 포스트시즌, 국제대회 등에서도 꾸준히 얼굴을 비췄다. 그만큼 강민호가 롯데에서 14시즌 동안 남긴 족적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강민호의 야구인생 2막을 올리기 전, 그의 1막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꼬마 포도대장’의 등장(2005년 4월 3일)
2005년 롯데의 포수진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전년도 주전포수 최기문은 병역비리에 연루되었다가 돌아와 스프링캠프를 소화하지 못했고, 백업포수 최준석과 박경진은 여전히 미덥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양상문 당시 롯데 감독이 꺼내든 카드는 2004년 1군 3경기 출장, 2군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만 20살의 강민호였다.
삼성과의 개막 2연전 첫날 벤치를 지킨 강민호는 이튿날 8번타자 겸 포수로 선발출장한다. 결과는 좋지 않아 1회부터 심정수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했고 타석에서도 3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부진했다. 그렇지만 이 경기 이후 강민호는 7경기 연속 선발출장을 하는 등 감독의 신뢰를 받았다. 4월 28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데뷔 첫 홈런을 쏘아올렸다. 홈런을 허용한 투수의 이름은 손승락이었다.
2. 역대 최초의 포수 전 경기 선발출장(2006년 10월 5일)
2005년 강민호와 함께 안방을 지킨 최기문은 팔꿈치 통증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백업이던 박경진은 부상과 부진으로, 최준석은 지명타자 전향으로 역시 마스크를 벗었다. 그렇게 맞이한 2006년 시즌, 강민호는 1년 동안 팀의 모든 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KBO 역사상 다시 없을 엄청난 혹사를 당하게 된다. 한해 200경기씩 출장했다는 니그로리거 조시 깁슨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연장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만 12경기였고 이 중 4경기는 12이닝 경기였다. 더블헤더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심지어 9월 20일 두산과의 더블헤더에서는 교체없이 18이닝을 모두 소화하기도 했다. 2006년 강민호의 포수 전 경기 선발 출장 기록은 KBO 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며, 팀의 1,118.2이닝 중 1,040이닝을 소화했다.(점유율 92.9%)
3. “Low ball?”(2008년 8월 23일)
진갑용-조인성-홍성흔으로 이어지던 국가대표 포수진의 세대교체를 위해 강민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전 포수 진갑용의 백업 역할이었으나 진갑용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빠지게 되며 강민호가 주전이 되었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쐐기 적시 2루타를 때리며 큰 경기 경험이 없다는 약점을 털어버린 강민호는 결승전에서도 선발출장한다.
8회까지 선발 류현진을 잘 리드한 강민호는 그러나 9회 어이없이 퇴장을 당하게 된다. “Low ball?” 이라고 물은 것을 심판이 “No ball”로 듣고 퇴장을 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라운드를 떠나면서 강민호는 그 유명한 ‘99마일 미트던지기’를 선보였다. 이후 정대현의 완벽한 마무리로 대한민국은 금메달을 얻었고, 강민호는 병역특례를 받게 된다.
4. 생애 첫 끝내기 홈런(2009년 6월 19일)
2009년 강민호는 슬럼프에 빠졌다. 수년 간의 혹사로 인한 팔꿈치 문제로 정상적인 타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9년은 기록적인 타고투저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민호의 성적은 타율 0.260, 9홈런에 그쳤고 9월 초에는 팔꿈치 수술로 시즌아웃되고 만다. 최악의 시즌이었지만, 강민호가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기록한 것도 2009년이었다.
6월 19일 사직 KIA전. 롯데는 상대 선발 릭 구톰슨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며 2대3 뒤진 상황에서 9회말을 맞이한다. 1아웃에서 상대 실책으로 출루에 성공했지만 이대호가 직선타로 물러나며 2아웃. 그러나 이후 김민성과 정보명의 연속안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진 타석은 9회부터 마스크를 쓴 강민호. 그리고 강민호는 한기주의 초구를 공략해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끝내기 3점포를 쏘아올렸다. 프로 데뷔 첫 끝내기 홈런이었다.
5. 9회 2아웃 동점 투런(2012년 6월 22일)
2012년 6월 22일 잠실에서 벌어진 ‘엘롯라시코’ 3연전 첫 날,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경기 내내 시소게임을 하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9회가 시작됐을 때 스코어는 3대5 LG의 리드. 마운드에는 그때까지 블론세이브가 하나도 없던 봉중근이 올라왔다. 2아웃까지 몰린 상황에서 손아섭이 안타를 치고 나갔고 다음 타자는 4번타자 강민호.
강민호는 봉중근의 초구 빠른 볼을 받아쳐 좌측으로 날아가는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5대 5, 게임 리셋. 연장전에서 롯데는 12회초 박종윤의 내야안타로 역전에 성공했고 남은 두 경기마저 쓸어담았다. 그리고 홈런을 허용한 봉중근은 소화전을 가격하다 부상을 입으며 한동안 출장하지 못했다.
6. “강민호 구경도 못할 것”(2013년 11월 13일)
2013년 강민호는 뇌진탕 후유증으로 타격에서 부진에 시달렸다. 꾸준히 중심타선에 들어섰지만 그의 홈런은 11개. 아쉬운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수비에서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고 FA 자격을 얻은 그의 가치는 여전히 높았다. 강민호의 거취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삼민호’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도 이때였다.
그렇지만 당시 롯데의 고위 관계자는 “타 팀은 강민호를 구경도 못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이 발언이 알려진 날 강민호는 4년 총액 75억원(계약금 35억원, 연봉 총액 40억원)에 롯데와 재계약에 성공했다. 당시까지 역대 최고액 계약이었다. 협상의 분위기도 좋아서 이때까지만 해도 강민호와 롯데의 관계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7. 3홈런-8타점 경기(2015년 4월 5일)
하지만 FA 계약 다음 해인 2014년에도 강민호는 이렇다 할 반등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5년 초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개막 후 첫 4경기에서 13타수 2안타 4삼진을 기록했고 2015년에도 전망은 어두워만 보였다. 하지만 개막 이후 강민호는 장종훈 타격코치와 타격 포인트 조정에 힘썼고, 이는 강민호가 부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4월 5일 사직 두산전. 이적한 친구 장원준과의 맞대결로 관심을 모은 상황에서 강민호는 첫 타석에서 좌측담장을 넘기는 투런포를 날렸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7회에는 김강률을 상대로 또 한번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그리고 8회에는 이원재를 상대로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만루홈런을 기록했다. 3홈런 8타점으로 완벽한 부활을 알린 강민호는 0.311 35홈런 86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8. 강민호 야구장 건립(2016년 1월 6일)
대형 계약 체결 이후 강민호는 선행에도 앞장섰다. 어린이날 지역 아동들을 위해 신발을 기부했고 홈런 1개당 100kg의 쌀을 기부하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강민호의 선행은 야구계에서도 이어졌다. 아마추어를 위한 야구장 건립. 바로 ‘강민호 야구장’이었다.
허구연 해설위원의 추천으로 2015년 강민호는 경남 양산시와 야구장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2억원을 쾌척하기로 했다. 2016년 1월 완공된 강민호 야구장은 현재 지역 사회인야구 경기장 및 인근 학교 야구부의 연습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강민호는 야구장 건립과 그 동안의 선행들이 인정받으며 2015년 사랑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9. 롯데 소속 최다경기 출장(2017년 8월 1일)
2003년 8월 29일, 김응국은 통산 1,454번째 경기에(투수 14+야수 1,440) 출장했다. 그리고 이 날 김응국이 세운 롯데 팀 내 최다출장 기록은 약 5,000여일이 지난 2017년 8월 1일에 깨지게 된다. 주인공은 역시 강민호였다.
이미 7월 9일 사직 SK전에서 롯데 야수 최다출장 기록을 세운 강민호는 8월 1일 잠실 LG전에서 5번타자 겸 포수로 선발출장하며 1,455경기째 출장을 이뤄냈다. 김용희도, 김민호도, 이대호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었다.
10. 악몽의 준PO 1차전(2017년 10월 8일)
팀 내 최다출장선수가 된 2017년, 강민호는 오랜만에 포수 1,000이닝을 소화하며 헐거워진 팀의 안방을 홀로 지켜냈다. 그의 희생에 힘입어 롯데는 팀 역사상 최초로 80승을 기록했고 준플레이오프 직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맞이한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강민호에게는 차라리 악몽이라 부르고 싶었을 시간이었다.
1회 초부터 폭투를 허용하며 불안하게 출발한 강민호는 혼자서만 세 번의 2사 1, 2루 찬스를 날렸고 비디오 판독 두 번을 자신의 플레이에 사용하게 만들었다.(모두 원심 유지) 7회까지 3개의 도루를 허용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11회초 수비에서 강민호는 폭투, 도루허용, 포일, 만루홈런 허용 등 한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모두 보여주었다. 결국 롯데는 11회 초에만 7점을 내 줬고 팽팽했던 경기는 NC의 9대2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2차전에서는 어느 정도 부진을 만회했고 5차전에서는 천적이던 에릭 해커에게 안타를 쳐내는 등 분전했지만 결국 롯데는 2승 3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강민호가 롯데에서 출장한 마지막 시리즈가 되고 말았다.
야구공작소
양정웅 칼럼니스트
기록 출처 : STATIZ.co.kr, KBO 연감
강민호는 롯데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장한 선수이다(1,495경기 / 2위 김응국 1,454경기). 그는 페넌트레이스뿐만 아니라 포스트시즌, 국제대회 등에서도 꾸준히 얼굴을 비췄다. 그만큼 강민호가 롯데에서 14시즌 동안 남긴 족적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강민호의 야구인생 2막을 올리기 전, 그의 1막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꼬마 포도대장’의 등장(2005년 4월 3일)
2005년 롯데의 포수진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전년도 주전포수 최기문은 병역비리에 연루되었다가 돌아와 스프링캠프를 소화하지 못했고, 백업포수 최준석과 박경진은 여전히 미덥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양상문 당시 롯데 감독이 꺼내든 카드는 2004년 1군 3경기 출장, 2군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만 20살의 강민호였다.
삼성과의 개막 2연전 첫날 벤치를 지킨 강민호는 이튿날 8번타자 겸 포수로 선발출장한다. 결과는 좋지 않아 1회부터 심정수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했고 타석에서도 3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부진했다. 그렇지만 이 경기 이후 강민호는 7경기 연속 선발출장을 하는 등 감독의 신뢰를 받았다. 4월 28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데뷔 첫 홈런을 쏘아올렸다. 홈런을 허용한 투수의 이름은 손승락이었다.
2. 역대 최초의 포수 전 경기 선발출장(2006년 10월 5일)
2005년 강민호와 함께 안방을 지킨 최기문은 팔꿈치 통증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백업이던 박경진은 부상과 부진으로, 최준석은 지명타자 전향으로 역시 마스크를 벗었다. 그렇게 맞이한 2006년 시즌, 강민호는 1년 동안 팀의 모든 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KBO 역사상 다시 없을 엄청난 혹사를 당하게 된다. 한해 200경기씩 출장했다는 니그로리거 조시 깁슨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연장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만 12경기였고 이 중 4경기는 12이닝 경기였다. 더블헤더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심지어 9월 20일 두산과의 더블헤더에서는 교체없이 18이닝을 모두 소화하기도 했다. 2006년 강민호의 포수 전 경기 선발 출장 기록은 KBO 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며, 팀의 1,118.2이닝 중 1,040이닝을 소화했다.(점유율 92.9%)
3. “Low ball?”(2008년 8월 23일)
진갑용-조인성-홍성흔으로 이어지던 국가대표 포수진의 세대교체를 위해 강민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전 포수 진갑용의 백업 역할이었으나 진갑용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빠지게 되며 강민호가 주전이 되었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쐐기 적시 2루타를 때리며 큰 경기 경험이 없다는 약점을 털어버린 강민호는 결승전에서도 선발출장한다.
8회까지 선발 류현진을 잘 리드한 강민호는 그러나 9회 어이없이 퇴장을 당하게 된다. “Low ball?” 이라고 물은 것을 심판이 “No ball”로 듣고 퇴장을 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라운드를 떠나면서 강민호는 그 유명한 ‘99마일 미트던지기’를 선보였다. 이후 정대현의 완벽한 마무리로 대한민국은 금메달을 얻었고, 강민호는 병역특례를 받게 된다.
4. 생애 첫 끝내기 홈런(2009년 6월 19일)
2009년 강민호는 슬럼프에 빠졌다. 수년 간의 혹사로 인한 팔꿈치 문제로 정상적인 타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9년은 기록적인 타고투저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민호의 성적은 타율 0.260, 9홈런에 그쳤고 9월 초에는 팔꿈치 수술로 시즌아웃되고 만다. 최악의 시즌이었지만, 강민호가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기록한 것도 2009년이었다.
6월 19일 사직 KIA전. 롯데는 상대 선발 릭 구톰슨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며 2대3 뒤진 상황에서 9회말을 맞이한다. 1아웃에서 상대 실책으로 출루에 성공했지만 이대호가 직선타로 물러나며 2아웃. 그러나 이후 김민성과 정보명의 연속안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진 타석은 9회부터 마스크를 쓴 강민호. 그리고 강민호는 한기주의 초구를 공략해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끝내기 3점포를 쏘아올렸다. 프로 데뷔 첫 끝내기 홈런이었다.
5. 9회 2아웃 동점 투런(2012년 6월 22일)
2012년 6월 22일 잠실에서 벌어진 ‘엘롯라시코’ 3연전 첫 날,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경기 내내 시소게임을 하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9회가 시작됐을 때 스코어는 3대5 LG의 리드. 마운드에는 그때까지 블론세이브가 하나도 없던 봉중근이 올라왔다. 2아웃까지 몰린 상황에서 손아섭이 안타를 치고 나갔고 다음 타자는 4번타자 강민호.
강민호는 봉중근의 초구 빠른 볼을 받아쳐 좌측으로 날아가는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5대 5, 게임 리셋. 연장전에서 롯데는 12회초 박종윤의 내야안타로 역전에 성공했고 남은 두 경기마저 쓸어담았다. 그리고 홈런을 허용한 봉중근은 소화전을 가격하다 부상을 입으며 한동안 출장하지 못했다.
6. “강민호 구경도 못할 것”(2013년 11월 13일)
2013년 강민호는 뇌진탕 후유증으로 타격에서 부진에 시달렸다. 꾸준히 중심타선에 들어섰지만 그의 홈런은 11개. 아쉬운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수비에서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고 FA 자격을 얻은 그의 가치는 여전히 높았다. 강민호의 거취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삼민호’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도 이때였다.
그렇지만 당시 롯데의 고위 관계자는 “타 팀은 강민호를 구경도 못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이 발언이 알려진 날 강민호는 4년 총액 75억원(계약금 35억원, 연봉 총액 40억원)에 롯데와 재계약에 성공했다. 당시까지 역대 최고액 계약이었다. 협상의 분위기도 좋아서 이때까지만 해도 강민호와 롯데의 관계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7. 3홈런-8타점 경기(2015년 4월 5일)
하지만 FA 계약 다음 해인 2014년에도 강민호는 이렇다 할 반등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5년 초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개막 후 첫 4경기에서 13타수 2안타 4삼진을 기록했고 2015년에도 전망은 어두워만 보였다. 하지만 개막 이후 강민호는 장종훈 타격코치와 타격 포인트 조정에 힘썼고, 이는 강민호가 부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4월 5일 사직 두산전. 이적한 친구 장원준과의 맞대결로 관심을 모은 상황에서 강민호는 첫 타석에서 좌측담장을 넘기는 투런포를 날렸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7회에는 김강률을 상대로 또 한번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그리고 8회에는 이원재를 상대로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만루홈런을 기록했다. 3홈런 8타점으로 완벽한 부활을 알린 강민호는 0.311 35홈런 86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8. 강민호 야구장 건립(2016년 1월 6일)
대형 계약 체결 이후 강민호는 선행에도 앞장섰다. 어린이날 지역 아동들을 위해 신발을 기부했고 홈런 1개당 100kg의 쌀을 기부하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강민호의 선행은 야구계에서도 이어졌다. 아마추어를 위한 야구장 건립. 바로 ‘강민호 야구장’이었다.
허구연 해설위원의 추천으로 2015년 강민호는 경남 양산시와 야구장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2억원을 쾌척하기로 했다. 2016년 1월 완공된 강민호 야구장은 현재 지역 사회인야구 경기장 및 인근 학교 야구부의 연습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강민호는 야구장 건립과 그 동안의 선행들이 인정받으며 2015년 사랑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9. 롯데 소속 최다경기 출장(2017년 8월 1일)
2003년 8월 29일, 김응국은 통산 1,454번째 경기에(투수 14+야수 1,440) 출장했다. 그리고 이 날 김응국이 세운 롯데 팀 내 최다출장 기록은 약 5,000여일이 지난 2017년 8월 1일에 깨지게 된다. 주인공은 역시 강민호였다.
이미 7월 9일 사직 SK전에서 롯데 야수 최다출장 기록을 세운 강민호는 8월 1일 잠실 LG전에서 5번타자 겸 포수로 선발출장하며 1,455경기째 출장을 이뤄냈다. 김용희도, 김민호도, 이대호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었다.
10. 악몽의 준PO 1차전(2017년 10월 8일)
팀 내 최다출장선수가 된 2017년, 강민호는 오랜만에 포수 1,000이닝을 소화하며 헐거워진 팀의 안방을 홀로 지켜냈다. 그의 희생에 힘입어 롯데는 팀 역사상 최초로 80승을 기록했고 준플레이오프 직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맞이한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강민호에게는 차라리 악몽이라 부르고 싶었을 시간이었다.
1회 초부터 폭투를 허용하며 불안하게 출발한 강민호는 혼자서만 세 번의 2사 1, 2루 찬스를 날렸고 비디오 판독 두 번을 자신의 플레이에 사용하게 만들었다.(모두 원심 유지) 7회까지 3개의 도루를 허용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11회초 수비에서 강민호는 폭투, 도루허용, 포일, 만루홈런 허용 등 한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모두 보여주었다. 결국 롯데는 11회 초에만 7점을 내 줬고 팽팽했던 경기는 NC의 9대2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2차전에서는 어느 정도 부진을 만회했고 5차전에서는 천적이던 에릭 해커에게 안타를 쳐내는 등 분전했지만 결국 롯데는 2승 3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강민호가 롯데에서 출장한 마지막 시리즈가 되고 말았다.
야구공작소
양정웅 칼럼니스트
기록 출처 : STATIZ.co.kr, KBO 연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