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피오리아(미국 애리조나주), 이상학 기자] 2억8000만 달러 거액을 들여 영입한 유격수가 1년 만에 포지션을 2루수로 옮긴다. 실력으로 거물 선수를 밀어낸 김하성(28·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 유격수 자리를 되찾았다. 예비 FA로 가치를 한껏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김하성은 17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오리아의 피오리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4 샌디에이고 스프링 트레이닝 풀스쿼드 첫 날 아침부터 마이크 쉴트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쉴트 감독은 김하성에게 “유격수로 간다”고 말했다. 앞서 잰더 보가츠(32)가 쉴트 감독과의 면담을 통해 유격수에서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받아들이기로 한 뒤였다.
김하성이 기다려온 말이었다. 훈련 전 클럽하우스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난 김하성은 “곧 아시게 되겠지만 포지션 변동 사항이 있다. 준비를 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즌 후 팔꿈치 관절경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인 매니 마차도의 3루수 자리로 이동할 가능성을 묻자 김하성은 “(조금 있다) 정확하게 아시게 될 것이다”면서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곧 이어진 쉴트 감독의 인터뷰에서 김하성의 유격수 복귀가 발표됐다. 쉴트 감독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 보가츠는 지난해 우리 팀의 유격수로 좋은 활약을 했다. 긍정적인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그는 좋은 팀 동료이고, 김하성의 유격수로서 가치를 인정했다. 김하성은 엘리트 수비수”라며 두 선수의 포지션을 바꾼 이유를 밝혔다.
메이저리그 11시즌 경력의 보가츠는 통산 175홈런을 기록 중인 거포로 실버 슬러거 5회, 올스타 4회에 빛난다. 2014년부터 10년을 풀타임 유격수로 뛰었다. 몸값도 워낙 비싸 쉽게 다룰 수 없는 스타 선수이지만 샌디에이고 수뇌부는 지난해 시즌을 마칠 무렵부터 보가츠의 포지션 이동을 논의했다. 새로운 사령탑이 된 쉴트 감독이 지난해 12월 보가츠의 고향인 네덜란드령 퀴라소 아루바를 찾아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날 캠프 공식 훈련 첫 날 통보가 이뤄졌다. 11년 장기 계약을 맺고 1년 만에 주 포지션에서 밀려난 모양새가 됐지만 보가츠는 15초 만에 이 같은 결정을 받아들였다. 쉴트 감독은 “포지션 변경 과정에서 보가츠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하늘을 찔렀다. 보가츠는 유격수로서 김하성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의 팀 우선주의, 팀에 대한 배려, 큰 그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예우를 갖췄다.
자존심이 상했을 보가츠이지만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난 야구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팀을 더 나아지게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수비에 있어 김하성을 존경한다. 사실 그를 많이 존경한다. 그러니 나쁠 게 없다”며 “아직은 유격수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고,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쉴트 감독이 최대한 좋게 포장했지만 냉정하게 수비 실력에서 보가츠가 김하성에게 밀린 것이다. 미국 ‘야후스포츠’는 ‘쉴트 감독의 말과 달리 보가츠는 유격수 자리에서 수비보다 타격으로 유명하다. 내야 수비에 대한 지표는 엇갈린다. 지난해 평균 대비 아웃카운트 처리 지표인 OAA는 +3으로 평균 이상을 기록했지만 수비로 실점을 막아낸 DRS는 -4였다’며 보가츠의 수비력 저하가 포지션 변경의 주된 사유라고 직설했다.
보가츠 입장에서 지금 당장은 자존심 상하고 속 쓰릴 일이다. 하지만 유격수보다 수비 부담이 덜한 2루수로 타격에 조금 더 집중하며 전체적인 성적 향상을 기대할 만하다. 지난해 보가츠는 손목 부상 여파 속에 155경기 타율 2할8푼5리(596타수 170안타) 19홈런 58타점 OPS .790으로 타격 성적도 기대에 못 미쳤다. 보가츠는 “빅리그에서 4번타자를 칠 수 있는 2루수는 많지 않다. 밝은 면을 보겠다”며 “포지션에 상관없이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다. 유격수라면 좋겠지만 2루수도 마찬가지로 좋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대부분 언론이 보가츠의 2루수 이동에 포커스를 맞췄지만 야후스포츠는 ‘이번 이동은 김하성에게 더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김하성은 2021년 한국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뒤 내야 전 포지션에서 뛰어난 수비수로 활약했다’며 ‘지난해 김하성은 베이스볼레퍼런스 기준 WAR 5.8을 기록했는데 야수 중 10명의 선수만이 그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김하성의 WAR은 수비가 큰 도움이 됐다. 샌디에이고가 유격수로 김하성을 원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이어 ‘올 시즌을 마치고 FA 자격을 얻는 김하성은 메이저리그 프리미엄 포지션에서 또 한 번의 가치 있는 시즌을 보내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고 FA 대박을 기대했다. 포수와 함께 수비가 가장 중요시되는 유격수 자리에서 지난해 같은 타격 생산력을 보여준다면 1억 달러를 넘어 한국인 빅리거 역대 최고액 계약을 기대할 만하다.
김하성은 지난 2021년 1월 샌디에이고 4+1년 보장 2800만 달러에 계약하며 메이저리그에 왔다. 내년 상호 옵션으로 1000만 달러 계약이 남아있지만 연장 계약이 이뤄지지 않으면 김하성이 이를 거부하고 FA 시장에 나올 게 유력하다. 그렇다면 지난해 12월 6년 1억1300만 달러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한 이정후를 넘어설 게 유력하다. 2013년 12월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1억3000만 달러에 계약한 외야수 추신수(SSG 랜더스) 기록까지 넘보고 있다.
김하성의 FA 비교 대상으로는 댄스비 스완슨(시카고 컵스), 트레버 스토리(보스턴 레드삭스)가 있다. FA가 되는 나이대, 포지션이 비슷해 적절한 비교 대상으로 이름이 나왔다. 스완슨은 2022년 12월 컵스와 7년 1억7700만 달러, 스토리는 2022년 3월 보스턴과 6년 1억4000만 달러에 계약했다. 김하성 계약의 기준점이다.
김하성를 제외하고 올 시즌 후 FA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유격수 자원은 윌리 아다메스(밀워키 브루어스)밖에 없다. 김하성과 같은 1995년생 유격수로 장타력이 뛰어나지만 전반적인 타격 생산성과 수비력은 지난해 김하성이 조금 더 우위였다. 예비 FA 2루수 호세 알투베가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5년 1억2500만 달러에 연장 계약하고, 14년 3억7780만 달러에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연장 계약한 바비 위트 주니어도 트레이드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중앙 내야수가 극히 부족한 시장 상황도 김하성에게 유리한데 유격수 복귀까지 이뤄지면서 그야말로 일일 술술 풀리고 있다.
FA 초대박을 위한 발판은 제대로 마련됐다. 이제 김하성이 그 기회를 잘 살리는 것만 남았다. 유격수 복귀가 FA에 미칠 영향에 대해 김하성은 “나한테 이득이 되는 것보다 팀이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 FA는 내가 잘하면 알아서 따라오는 것이다. 내가 FA를 따라가면 분명 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매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고 자신했다.
유격수 복귀는 FA에 앞서 김하성의 트레이드 가격이 훨씬 더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A.J. 프렐러 샌디에이고 단장은 여러 팀들로부터 김하성 트레이드 문의를 받고 있다고 인정하며 전화기를 끊지는 않을 것이라고 트레이드 불씨를 남겼다. 유격수 자리에서 김하성이 시즌 초중반까지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트레이드 가격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질 것이다. 어쩌면 프렐러 단장의 포석일지도 모른다.
샌디에이고는 적어도 시즌 초반까지는 김하성을 트레이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보다 전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매니 마차도, 보가츠, 다르빗슈 유, 조 머스그로브 등 베테랑 고액 장기 계약 선수들이 1살이라도 더 젊을 때 승부를 봐야 한다. 성적을 포기할 수 없는 시즌이고, 즉시 전력으로서 가치가 높은 김하성을 쉽게 내줄 수 없다.
7월 트레이드 마감시한에 샌디에이고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김하성 거취도 결정날 전망이다. 7월이 되면 김하성을 둘러싼 트레이드설도 갈수록 구체화되면서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김하성은 “7월에 내 이름이 거론되면 좋은 시즌을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한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래도 샌디에이고에 남고 싶은 생각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인터뷰에서도 “샌디에이고가 너무 좋다. 떠나기는 싫다”고 말한 김하성은 계속해서 팀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이유가 있다. 그는 “다른 팀에 가면 ‘샌디에이고 팬들처럼 나를 이렇게 좋아해줄까’ 하는 생각이 크다”며 “이게 비즈니스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고 뛰는 만큼 하던대로 좋은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도록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격수 복귀로 샌디에이고 잔류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것도 김하성에겐 좋은 동기 부여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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