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뉴스 | 채준 기자]
금빛 장식 모자와 옥수수껍질 파이프에 레이밴 선글라스를 쓴 미국의 상징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964).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최고 사령관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군인의 길 말고도 미국의 올림픽 정신을 빛낸 '올림피안'이었다는 이색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장군이었으면서도 미국 올림픽 정신의 아버지로 불렸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전,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미국팀을 이끈 선수단 단장을 맡아 미국이 금메달 22개 등 메달순위 1위를 차지하고, 7개 세계신기록과 17개 올림픽신기록을 세우는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00여년이 지나 네덜란드와 이웃한 프랑스에서 2024 파리 올림픽이 한창인 가운데 맥아더 장군이 어떻게 미국 올림픽을 빛내는 위인이 됐는가를 살펴본다. '올림피안'으로서의 그의 활약상은 맥아더 평전인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의 '아메리칸 시저 1'편에 잘 서술돼 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16년 6월14일자 '맥아더는 미국 올림픽을 어떻게 구했나'라는 제목으로 맥아더 장군과 미국 올림픽 관계에 대해 보도했다.
미국이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맥아더의 작품이었다. 1927년 8월 중순 윌리엄 크리스토퍼 프로우트 미국올림픽위원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 교장시절 맥아더 장군이 선수들을 강력히 지원해 준 사실을 알고 여러 미국올림픽위원들이 위원장직을 맡아줄 것을 그에게 제안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전함 침몰과 소형 비행선 충돌을 야기시킨 빌리 미첼 준장의 군법회의 재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다소 한직에 있었던 그가 미국 올림픽 수장을 맡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1919년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부임해 스포츠 활동을 적극 장려하는 파격적인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생도들의 스포츠 활동 생활화 및 기량 향상을 위해 적극 지원했다.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스포츠를 통해 미래 미국 장교가 될 사관생도들의 우수성을 키워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 가장 공부를 잘하는 수재였으면서도 운동선수로도 탁월한 성과를 냈다. 웨스트포인트에 수석 입학한 맥아더는 2470점 만점에 2424점을 기록, 동기생 94명 중 수석 졸업의 영광까지 안았다. 그는 생도시절 야구선수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신력과 체력을 키웠다.
그가 성공하기까지는 어머니 핑키 여사의 헌신적인 지원이 뒷받침됐다고 한다. '아메리칸 시저 1'편과 미군의 한국전쟁 이야기를 다룬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가장 추운 겨울)'에선 맥아더를 전형적인 과잉보호의 희생자로서 어머니의 야심에서 비롯한 무자비한 명령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해 낸 '마마보이'였다고 평가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자 아예 학교 근처에 있는 크레이니 호텔로 이사해 아들 방이 보이는 위치에 묵으며 아들을 불을 켜고 공부를 하는지 감시할 정도로 극성이었다고 한다. 나중엔 상관들에게 아들의 승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일도 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열정적으로 올림픽위원장 자리를 수락했다. 마치 군사 작전을 계획하듯이 그 일에 몰두했다. 코치를 만나고, 선수들에게 고무적인 연설을 하고, 위원회를 후원하고, 운동 일정을 계획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직접 행동에 옮겼다. 그는 전설적인 단거리 선수 찰리 패독이 아마추어 지위를 위협하는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후방에서 저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우아한 패배가 아닌,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서 왔다"
군인인 그에게 올림픽은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선수들 앞에서 그는 "우리는 여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를 대표해서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아한 패배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승리를 위해서, 그것도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서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맥아더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리게 했다. 독일 최고 수영 선수인 힐더 슈라더의 수영복 끈 한쪽이 끊어졌을 때, 사진기자들한테 보란 듯이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미국 복싱팀 단장이 불공정한 판정에 불복해 선수단을 철수하겠다고 위협을 했을 때는, 그의 특유의 표정인 턱을 앞으로 밀어 내놓고 굵은 목소리로 "미국인은 절대로 중간에 떠나는 법이 없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맥아더가 선수단을 특히 감동시켰던 것은 루스벨트호를 타고 선수단이 암스테르담 항을 떠날 때였다. 배가 부두를 막 떠나는 순간, 트랩 바로 밑에서 미국인 2명이 밀항자로 관리들에게 붙잡혔다. 두 명은 올림픽팀에 선발되지 못했지만 올림픽이 보고 싶어 암스테르담에 왔지만 돈이 떨어져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선수단도 아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자 맥아더는 "바로 내가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야!"하고 외치면서 그들을 배위로 끌어 올렸다. 맥아더는 그들에게 배 페인트 벗기는 작업을 맡겨 배삯으로 대신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장으로 이름을 날린 맥아더 장군은 종전 후 일본점령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6월, 다음 달 열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위한 한국 선수단이 서울역에서 부산행 특별열차 '해방자호' 1등 침대차를 타고 장장 20여 일동안 이어질 런던행 장도에 올랐다. 선수단은 홍콩까지 선편으로 가서 그곳에서 비행기를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산을 출항한 선수단은 홍콩이 아닌 일본으로 향했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선수단은 교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본 땅을 밟았다. 맥아더는 도쿄 근교 가마쿠라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한국 선수단을 초청해 성대한 환송연을 여로 올림픽에서 선전을 당부했다. 맥아더의 격려를 받은 선수단은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김성집, 복싱 한수안이 동메달 2개를 획득, 신생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렸다.
맥아더는 일본점령군사령관 시절 야구가 일본에 다시 돌아오고 활성화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3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는 말년에도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에서 '아마추어 체육협회'와 '대학스포츠위원회의 분쟁이 벌어졌을 때,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82세의 맥아더에게 해결을 부탁했다. 두 단체는 그의 중재에 동의했다. 케네디는 "맥아더 덕분에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미국 체육계에 그는 영원한 '올림피안'으로 남아 있다.
-김학수 CST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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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pixabay |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군인의 길 말고도 미국의 올림픽 정신을 빛낸 '올림피안'이었다는 이색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장군이었으면서도 미국 올림픽 정신의 아버지로 불렸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전,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미국팀을 이끈 선수단 단장을 맡아 미국이 금메달 22개 등 메달순위 1위를 차지하고, 7개 세계신기록과 17개 올림픽신기록을 세우는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00여년이 지나 네덜란드와 이웃한 프랑스에서 2024 파리 올림픽이 한창인 가운데 맥아더 장군이 어떻게 미국 올림픽을 빛내는 위인이 됐는가를 살펴본다. '올림피안'으로서의 그의 활약상은 맥아더 평전인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의 '아메리칸 시저 1'편에 잘 서술돼 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16년 6월14일자 '맥아더는 미국 올림픽을 어떻게 구했나'라는 제목으로 맥아더 장군과 미국 올림픽 관계에 대해 보도했다.
미국이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맥아더의 작품이었다. 1927년 8월 중순 윌리엄 크리스토퍼 프로우트 미국올림픽위원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 교장시절 맥아더 장군이 선수들을 강력히 지원해 준 사실을 알고 여러 미국올림픽위원들이 위원장직을 맡아줄 것을 그에게 제안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전함 침몰과 소형 비행선 충돌을 야기시킨 빌리 미첼 준장의 군법회의 재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다소 한직에 있었던 그가 미국 올림픽 수장을 맡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사진제공=pixabay |
맥아더 장군은 1919년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부임해 스포츠 활동을 적극 장려하는 파격적인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생도들의 스포츠 활동 생활화 및 기량 향상을 위해 적극 지원했다.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스포츠를 통해 미래 미국 장교가 될 사관생도들의 우수성을 키워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 가장 공부를 잘하는 수재였으면서도 운동선수로도 탁월한 성과를 냈다. 웨스트포인트에 수석 입학한 맥아더는 2470점 만점에 2424점을 기록, 동기생 94명 중 수석 졸업의 영광까지 안았다. 그는 생도시절 야구선수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신력과 체력을 키웠다.
그가 성공하기까지는 어머니 핑키 여사의 헌신적인 지원이 뒷받침됐다고 한다. '아메리칸 시저 1'편과 미군의 한국전쟁 이야기를 다룬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가장 추운 겨울)'에선 맥아더를 전형적인 과잉보호의 희생자로서 어머니의 야심에서 비롯한 무자비한 명령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해 낸 '마마보이'였다고 평가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자 아예 학교 근처에 있는 크레이니 호텔로 이사해 아들 방이 보이는 위치에 묵으며 아들을 불을 켜고 공부를 하는지 감시할 정도로 극성이었다고 한다. 나중엔 상관들에게 아들의 승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일도 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열정적으로 올림픽위원장 자리를 수락했다. 마치 군사 작전을 계획하듯이 그 일에 몰두했다. 코치를 만나고, 선수들에게 고무적인 연설을 하고, 위원회를 후원하고, 운동 일정을 계획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직접 행동에 옮겼다. 그는 전설적인 단거리 선수 찰리 패독이 아마추어 지위를 위협하는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후방에서 저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우아한 패배가 아닌,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서 왔다"
(서울=뉴스1) = SK텔레콤이 파리 올림픽 실전 감각을 높이기 위해 진천선수촌 펜싱 훈련장을 올림픽 경기장과 동일한 조건으로 구현했다고 1일 밝혔다. 사진은 진천선수촌 펜싱 훈련장. (SK텔레콤 제공) 2024.8.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
군인인 그에게 올림픽은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선수들 앞에서 그는 "우리는 여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를 대표해서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아한 패배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승리를 위해서, 그것도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서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맥아더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리게 했다. 독일 최고 수영 선수인 힐더 슈라더의 수영복 끈 한쪽이 끊어졌을 때, 사진기자들한테 보란 듯이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미국 복싱팀 단장이 불공정한 판정에 불복해 선수단을 철수하겠다고 위협을 했을 때는, 그의 특유의 표정인 턱을 앞으로 밀어 내놓고 굵은 목소리로 "미국인은 절대로 중간에 떠나는 법이 없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맥아더가 선수단을 특히 감동시켰던 것은 루스벨트호를 타고 선수단이 암스테르담 항을 떠날 때였다. 배가 부두를 막 떠나는 순간, 트랩 바로 밑에서 미국인 2명이 밀항자로 관리들에게 붙잡혔다. 두 명은 올림픽팀에 선발되지 못했지만 올림픽이 보고 싶어 암스테르담에 왔지만 돈이 떨어져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선수단도 아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자 맥아더는 "바로 내가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야!"하고 외치면서 그들을 배위로 끌어 올렸다. 맥아더는 그들에게 배 페인트 벗기는 작업을 맡겨 배삯으로 대신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장으로 이름을 날린 맥아더 장군은 종전 후 일본점령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6월, 다음 달 열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위한 한국 선수단이 서울역에서 부산행 특별열차 '해방자호' 1등 침대차를 타고 장장 20여 일동안 이어질 런던행 장도에 올랐다. 선수단은 홍콩까지 선편으로 가서 그곳에서 비행기를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산을 출항한 선수단은 홍콩이 아닌 일본으로 향했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선수단은 교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본 땅을 밟았다. 맥아더는 도쿄 근교 가마쿠라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한국 선수단을 초청해 성대한 환송연을 여로 올림픽에서 선전을 당부했다. 맥아더의 격려를 받은 선수단은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김성집, 복싱 한수안이 동메달 2개를 획득, 신생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렸다.
맥아더는 일본점령군사령관 시절 야구가 일본에 다시 돌아오고 활성화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3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는 말년에도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에서 '아마추어 체육협회'와 '대학스포츠위원회의 분쟁이 벌어졌을 때,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82세의 맥아더에게 해결을 부탁했다. 두 단체는 그의 중재에 동의했다. 케네디는 "맥아더 덕분에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미국 체육계에 그는 영원한 '올림피안'으로 남아 있다.
-김학수 CST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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