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척척박사] 2-46.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평제탑
입력 : 2024.08.22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타뉴스 | 채준 기자]
/사진제공=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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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定林寺址)는 충남 부여 시내 중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절터다.

이 곳에는 석재로 만든 오층의 석탑이 있다. 더 북쪽에는 고려시대 석불좌상이 있는데,현재는 보호각이 지어져 있어 불상을 안치한 금당으로 보인다.

정림사지는 2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란 명칭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8개 유적의 하나이다. 당시 부여의 4개 유적 즉'부소산과 관북리유적', '부여 왕릉원', '나성'과 함께 '정림사지'와 함께 공주의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익산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이 함께 등재되었다

정림사지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오층석탑이다. 이 탑은 한국의 석탑의 시원으로서 고대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그런데 현재 불리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란 명칭은 현대에 와서 붙여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소정방평제탑', 또는 '평제탑'이라 불렸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뜻이다. 왜 평제탑이어야 했는지, 이제는 백제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될수 있었는지 이탑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 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백제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고, 태자 문주가 왕위에 올라 공주, 당시의 웅진성으로 급히 수도를 옮겨야 했다 그후 63년이 지난 538년 성왕은 사비 천도를 단행하였다. 천도와 함께 국호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치고, 국가의 체제를정비하며 웅진에서 다져온 국력을 대외적으로 더욱 활발히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왕도 사비, 지금의 부여에는 왕성을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도시가 건설되었다.당시, 도교, 유교의 사상도 존재했으나, 지배적인 신앙은 불교였고,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서 불교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불교의 중심 현장은 사찰이었다. 여기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부처님의 무덤인 탑과 불상을 안치한 금당, 그리고 부속 건축물들이 존재하였다. 사비의 중심에 자리한 사찰은 백제에서 가장 핵심 사찰이었을 것으로여겨지고 있다. 또 왕도의 건설에 있어 빠질 수 없는 것이 종교시설이므로 이 사찰역시 백제의 왕도 건설과 발전, 그 속에서 궤를 같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잘 알다시피, 백제는 침류왕 원년인 서기 481년에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 국가의 통치 이념과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려 백제의 문화를 더욱풍성하게 꽃피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수도 사비의 중심에 있는 사찰, 당시 이 사찰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알 수 없다. 현재 불리고 있는 '정림사지'란 명칭은 절터에서 발견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고려 초기 기와의 명문에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 태평8년은 1028년(고려 현종 19년)이니 이 때에 대규모의 불사가 있어 이 기와를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정림사지 오층석탑/사진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부여정림사지 오층석탑/사진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림사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결정적인 역할은 한 것은 여기에 세워져 있는오층석탑이다. 이 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한국 고대 석탑의 대표한다. 미륵사지 석탑이 목제 탑을 석제로 만드는 과정에서 보다 충실면게 목탑의 부재를 석재로만들어 짜맞추었다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부재들을 단순화시켜 그 요소들만 따와서 기단, 탑신, 옥개 등으로 이루어진 약 8.83m의 석제 탑으로 재구성하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 위에 기둥은 민흘림으로 처리하였고, 얇고 넓은 지붕돌을 올려 놓는 모습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목제탑을모방한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백제만의 조형감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장중한분위기 속에서도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탑에는 특이하게도 2,126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제목은'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즉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비문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이 오층석탑은 '평제탑', '소정방평제탑' 등으로 불리어 왔다.현대에 와서야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오층석탑'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서기 660년 7월 13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의 침입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가 함락되었다. 74만호 620만명, 5방 37군 250성의 백제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백제 의자왕 비롯한 태자 융, 대신, 장수들과 백성 등 1만 수천명이 포로로 잡혀 당나라 낙양로 끌려갔다. 660년 8월 15일, 백제의 멸망 사실과당나라 황제와 소정방 등 백제 원정에 참여한 당의 장수들을 칭송하는 문구들이 백제오층석탑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제목으로 새겨졌다.

백제 오층석탑이 평제탑이 된지 1,285년 지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식민지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962년 12월 20일 백제 오층석탑은 '평제탑'의 오욕을 벗어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제 이름을 갖추며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비로소 명예를 회복한 셈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2015년 7월 8일, 정림사지는 한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다시 등재되기에 이르렀으니, 그 핵심인 백제 오층석탑은 완전한 한국과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것이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삶은 한이 넘치는 것처럼 민족의 문화유산, 그 중에서도 더욱빼어난 것일수록 더 심한 수난의 길에 접어 드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이러한 적나라한 사실을 여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온 몸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의 국력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역사도 바로 서고 그 문화도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 자체로 증명한다. 백제 대표 사찰의 오층석탑에서 평제탑으로, 평제탑에서 다시 대한민국의 국보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세계유산으로 거듭 난 정림사지의 핵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리가 왜 나라와 문화를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 온 몸으로 웅변한다.

- 이귀영 백제세계유산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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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척척박사] 2-46.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평제탑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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