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광주] 김현서 기자= 선동열 이후 기아 타이거즈에서 가장 기대받은 투수는 누구였을까.
몇몇 이름들이 바로 떠오르지만, 이 선수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 같다. 2002년 입단, 데뷔 첫해 12승, 탈삼진왕, 150km/h대의 묵직한 강속구. 그리고 결정적으로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프로 생활 내내 따라다닌 투수, 지난해 은퇴한 김진우(37)다.
풍운아의 사전적 의미는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며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지만 상황에 따라 '온갖 풍파를 거친 사람’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진우는 프로 생활 도중 여러 개인사의 아픔으로 기나긴 시간을 방황했고 그 결과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야 했다. 이후 마음을 다시 잡은 그는 어렵게 마운드에 복귀했으나 거듭된 부진과 부상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결국 최고의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던 그는 자기 관리 실패와 잦은 부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기자가 알고 지내는 한 기아 팬은 지금도 그를 떠올리면 아쉬움, 안타까움, 먹먹한 기분이 먼저 든다고 말한다. 김진우에게 ‘풍운아’는 어떤 의미였을까. 스포탈코리아는 김진우를 직접 만나 물어봤다. 그는 현재 광주에서 ‘JB 트레이닝 센터’를 차리고 유소년들을 지도하고 있다.
Q: 광주에서 아카데미를 차리게 된 이유는.
A: 고향이 광주는 아니지만, 초중고를 여기에서 나왔고 기아 출신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광주에서 아카데미를 열게 됐다.
Q: 지도자로 변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A: 일단 성격을 바꿨다. 운동할 때처럼 우락부락한 성격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화하게 성격을 바꿨다. 가끔 지도하다 보면 욱할 때가 있어 아이들을 혼내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형처럼 아빠처럼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Q: 선수 시절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먼저 기아 입단 전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준다면.
A: 뉴욕 양키스와 시애틀 매리너스를 포함해 4개 구단에서 제의를 받았다.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한 구단은 시애틀이었다. 금액은 230만 달러였다. 시애틀과 계약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는데 걱정이 많으셨다. 외동아들을 먼 타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셨나 보더라. 어머니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고민을 했는데 어머니 옆에 있고 싶더라. 그래서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기아를 선택했다.
Q: 프로 데뷔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나 순간은.
A: 모든 경기가 스쳐 지나가지만 그래도 신인 때 첫 선발로 뛰었던 경기와 기아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등판했던 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Q: 반면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A: 현역 시절 관리와 노력을 더 했더라면 기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아쉽다.
Q: KBO리그를 떠난 후 호주리그와 멕시칸리그에서 뛰었다. 그때 경험은 어땠나.
A: 너무 힘들었다. 확실히 한국에서 야구를 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호주에서는 상대 팀 선수들과 심판들의 인종 차별이 심했다. 특히 심판의 석연찮은 스트라이크 판정이 많아서 (스트라이크존의) 한 가운데만 보고 던져야 했다. 호주리그에는 메이저리그, 마이너리그 출신 타자들이 많아서 볼의 스피드가 빨라도 우습게 치더라. 멕시칸리그에서는 더 심했다. 시즌 들어가자마자 통역을 자르더라. 혼자서 통역 없이 두 달간 생활했다. 말이 안 통하다 보니 스케줄조차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번역기를 돌려가면서 노력했지만, 쉽지 않더라.
Q: 작년, 롯데 입단 테스트할 때 몸 상태는 어땠는지.
A: 멕시칸리그에서 웨이버 공시되면서 3주 동안 운동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이전시에서 롯데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고 일주일 정도 운동할 수 있었다. 몸 상태는 좋았다. 구속도 147~148km 정도 나왔다. 그런데 왜 불합격했을까. 당시 롯데 감독님께서 나이 많은 선수를 싫어하셨던 것 같다. 롯데 1군 투수 코치님들과 구단 관계자들의 현장 반응은 좋았다. 에이전시에서도 잘 될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틀어지더라. 그때 야구를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볼 만큼 해봤으니 그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Q: 그러고 보니 롯데에서 좋은 추억과 안 좋은 추억이 다 있다. (롯데를 상대로 완봉승 두 번 기록)
A: 유독 사직구장에서 강하긴 했다.(웃음) 개인 통산 첫 완봉승도 롯데를 상대로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입단 테스트는 통과를 못 했지만,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요즘 추세를 보면 실력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나이 많은 선수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불합격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Q: 선수 시절 내내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제는 다르게 불리고 싶지 않나.
A: 아니다. 여전히 좋다. 풍운아의 원래 뜻은 ‘시대의 흐름을 잘 타서 좋은 기운을 가져온다’로 알고 있다.
Q: 기아 팬들에겐 ‘아픈 손가락’으로 불린다.
A: 팬들에게 나는 애증의 선수였다. 내가 잘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기 때문에 화도 많이 나셨을 것이다. 나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더 화가 되더라. 야구를 편하게 해야 하는데 점점 나이가 드니까 부담이 많이 생기더라. 젊은 투수들도 밑에서 치고 올라왔고… 팬들의 믿음과 사랑을 받지 못 해서 잊혀질까봐 무섭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부상도 겹치고 상황이 더 악화되었던 것 같다.

Q: 이번에는 야구 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혹시 ‘삵진우’라는 별명을 알고 있나.
A: 알고 있다. (웃음) 어렸을 때 SNS 공간에 ‘나의 삶, 나의 인생’에 대한 글을 적었는데 ‘삶’을 ‘삵’이라고 적었다. 그 글을 본 팬들은 나를 보고 ‘삵, 삵’ 하더라.(웃음) 은퇴할 당시 심경 글을 본 팬들이 탄탄해진 문장력에 또 한 번 놀랐는데? ‘삵(삶)’을 적었을 당시에는 어렸다.(웃음) 은퇴할 때는 SNS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고 또한 나 자신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하려다 보니 글을 잘 썼던 것 같다.
Q: 초밥 158접시를 먹었다는 기사를 봤는데 지금도 가능한가.
A: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40접시까지 먹어봤다. 6살 된 아들은 10접시까지 먹더라. 정확히는 148접시를 먹었다. 일본 독립 리그에서 힘들게 뛸 때 먹었던 기록이다. 한국만 떠나면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다.(웃음) 먹방 유튜버로 변신할 생각은 없나? 없다. 먹방하면 살찌니까 하고 싶지 않다. 관리도 못 하는데.(절레)
Q: 마지막으로 올 시즌 가을야구 전망을 해본다면.
A: NC, 두산, 키움, LG 순으로 꼽고 싶다. 5위는 기아와 롯데의 싸움일 것 같은데 기아가 체력적으로 지치지만 않으면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앞으로의 목표는.
A: 현재 지도하고 있는 아이들이 좋은 기량을 갖춰서 프로나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마야구에 있다 보니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야구팬들이 아마야구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영상 촬영, 편집= 김형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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