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ALKOREA] 오상진 기자=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NPB) 통산 최다 안타(3,085개) 기록을 보유한 '레전드'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한국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냈다.
지난 29일 일본 '산케이신문'이 공개한 인터뷰에서 장훈은 "처음 말씀드리는 건데 몇 년 전 국적을 바꿨다. 지금은 일본 국적이다"라며 귀화 사실을 공개했다.
현역 시절 차별을 당하면서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장훈이었기에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결정이다.
장훈은 국적을 바꾼 배경에 대해 "한때 한 정권이 재일교포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다. 자의적으로 (일본에) 갔다느니, 그 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재일교포들은 (일본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징용되거나 먹고살기 어려워서 온 것"이라며 "일본에서 모두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필사적으로 일하고 열심히 살았다. 재일교포 1세들이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그는 "국적은 한 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당연히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은 재일교포로서 자부심을 살아가고 있다"라며 다시 한국 국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장훈은 1959년 NPB에 데뷔해 1981년까지 23년간 통산 2,75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9 504홈런 1,676타점 1,523득점 319도루 등을 기록하며 일본 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아직 NPB에서 통산 3,000안타의 벽을 넘은 선수는 장훈이 유일하다.
장훈은 현역 은퇴 후 한국에서 프로야구에 힘을 보탰다. 서종철 초대 총재의 특별보좌역을 맡은 장훈은 재일교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기을 열었다. 그는 "일본에서 좀처럼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설득해서 갔다. 이런 선수들이 기여해 줘서 초기 한국 프로야구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한 장훈은 "오랜 기간 한국과 일본의 가교역할과 재일교포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야구를 한 덕분"이라면서도 "그런데 몇 년 전에 한국 야구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준다고 관계자가 찾아왔지만 거절했다. 20년 넘게 특별보좌역을 하면서 프로리그를 일궈냈는데 한국시리즈, 올스타전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 나라(한국)의 나쁜 점이다. 은혜도 의리도 다 잊고"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장훈은 한일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차별도 있었다. 관동대지진(1923년)에는 방화를 했다느니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해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 일본인은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라고 일본이 일으킨 조선인 학살을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장훈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왜곡된 역사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했다.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한국에도 도움이 됐다"라며 "전기가 들어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큰 도로도 만들어주고 학교도 지어줬다. 한일 양국이 서로 협력해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고, 근대 국가로 성장했다"라고 말했다.
사진=뉴스1, 뉴시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29일 일본 '산케이신문'이 공개한 인터뷰에서 장훈은 "처음 말씀드리는 건데 몇 년 전 국적을 바꿨다. 지금은 일본 국적이다"라며 귀화 사실을 공개했다.
현역 시절 차별을 당하면서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장훈이었기에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결정이다.
장훈은 국적을 바꾼 배경에 대해 "한때 한 정권이 재일교포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다. 자의적으로 (일본에) 갔다느니, 그 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재일교포들은 (일본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징용되거나 먹고살기 어려워서 온 것"이라며 "일본에서 모두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필사적으로 일하고 열심히 살았다. 재일교포 1세들이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그는 "국적은 한 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당연히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은 재일교포로서 자부심을 살아가고 있다"라며 다시 한국 국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장훈은 1959년 NPB에 데뷔해 1981년까지 23년간 통산 2,75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9 504홈런 1,676타점 1,523득점 319도루 등을 기록하며 일본 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아직 NPB에서 통산 3,000안타의 벽을 넘은 선수는 장훈이 유일하다.
장훈은 현역 은퇴 후 한국에서 프로야구에 힘을 보탰다. 서종철 초대 총재의 특별보좌역을 맡은 장훈은 재일교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기을 열었다. 그는 "일본에서 좀처럼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설득해서 갔다. 이런 선수들이 기여해 줘서 초기 한국 프로야구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한 장훈은 "오랜 기간 한국과 일본의 가교역할과 재일교포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야구를 한 덕분"이라면서도 "그런데 몇 년 전에 한국 야구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준다고 관계자가 찾아왔지만 거절했다. 20년 넘게 특별보좌역을 하면서 프로리그를 일궈냈는데 한국시리즈, 올스타전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 나라(한국)의 나쁜 점이다. 은혜도 의리도 다 잊고"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장훈은 한일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차별도 있었다. 관동대지진(1923년)에는 방화를 했다느니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해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 일본인은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라고 일본이 일으킨 조선인 학살을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장훈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왜곡된 역사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했다.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한국에도 도움이 됐다"라며 "전기가 들어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큰 도로도 만들어주고 학교도 지어줬다. 한일 양국이 서로 협력해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고, 근대 국가로 성장했다"라고 말했다.
사진=뉴스1, 뉴시스,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