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작년 3월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비가 한창일 때다. 캐나다 대표팀도 애리조나(메사)에 모였다. 훈련 첫날부터 화이팅이 넘친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생겼다. 유니폼 때문이다. 일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나마 받은 것도 사이즈가 들쭉날쭉하다. 누구는 헐렁하고, 누구는 너무 꽉 낀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림이 들린다. 별 수 없다. “오늘은 그냥 반바지 차림으로 편하게 하는 걸로….”
그렇게 드레스 코드가 통보된 순간이다. 라커룸 한편에서 누군가 한마디 한다. “아니요. 난 긴 바지를 입을 거예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음성이다. 목소리 쪽으로 모두가 돌아본다. 유명한 다저스의 1루수 프레디 프리먼(35)이다.
그가 누군가. 팀 캐나다의 간판 스타다. 내셔널리그 MVP 1회(2020년), 올스타 7회, 골드글러브와 실버 슬러거를 여러 차례 수상한 주인공이다. 2021년에는 애틀랜타에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안겼다.
개인 기록도 최상급이다. 2000안타를 넘기고. 3000개를 향해 순항 중이다(현재 2147개). 이대로라면 명예의 전당 입성도 가능하다. 만약 본인이 원하면, 미국 대표팀도 충분했다. 팀 USA의 마크 데로사 감독도 적극 요청했다. 하지만, 스스로 캐나다 국기를 선택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캘리포니아다. LA 남쪽 오렌지 카운티에서 성장했다. 8살 때 기억이다.
“처음 야구장을 가봤어요. 에인절스 스타디움이었죠. 게임 전 팝콘을 먹고 있는데, 캐나다 국가가 나왔어요(상대 팀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그러자 누군가 날 휙 잡아 일으키는 거예요. 어머니였죠.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꼼짝도 못하게 했어요.”
어쩌면 그게 마지막이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2년 뒤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10살 때다. 더 이상 어머니와 야구장에 갈 수 없게 됐다. “너무나 좋은 분이었어요. 아마 하느님이 천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병명은 피부암(흑색종, melanoma)이었다.
그가 팀 캐나다를 택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캐나다 국적을 간직했다. 미국과 이중국적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게 아들의 얘기다.
“(캐나다를 위해서 뛰는 것이) 그게 어머니를 기억하는 방법이죠. 분명히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어요.” (프레디 프리먼)
그는 두 번(2017년, 2023년)의 WBC에 출전했다. 첫 대회는 3패, 두번째는 2승 2패로 모두 1라운드 탈락이었다. 만약 미국 대표로 나갔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다시 작년 3월 라커룸 얘기로 돌아간다. 간판스타가 긴 바지를 고집한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캐나다의 감독 어니 위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럴 거야. 모두가 그의 뜻을 존중했으면 좋겠다. 다들 긴 바지를 입고 훈련하도록.”
약간의 술렁임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 때문에 결정을 뒤집는 건 좀….” 그런 의아함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내막이 있다. 바로 프리먼의 어머니가 타계한 이유였다. 피부암은 가족력으로 남겨졌다. 아들도 매년 정기 검진을 빼놓지 않는다. 2016년 올스타 브레이크 때는 작은 사마귀를 제거하기 위해, 잠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나도 어머니를 닮아서 빨간 머리에 흰 피부를 가졌어요. 담당 의사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죠.”
무엇보다 병상의 어머니가 떠나기 전에 했던 당부는 20년이 넘도록 잊지 않는다. “아들아, 자외선 차단제 잘 바르고, 옷은 언제나 긴 팔, 긴 바지를 입어야 한다.” 그가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반소매 차림으로 플레이 하지 않는 이유다.
다저스가 인터 리그 3연전을 치렀다. 토론토와 원정 경기다. 1루수이자 3번 타자인 프리먼의 어머니 로즈메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리즈 동안 로저스 센터 가족석에는 특별한 팬이 자리했다. 프리먼의 아버지다(그 역시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 출신이다).
아버지는 현지 중계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들(프레디)은 아직도 신발에 어머니의 이니셜을 새겨 넣고 뛰고 있어요. 그리고 여전히 어머니가 당부한 말을 잘 지키며 플레이하고 있죠.”
오늘(한국시간 29일)이 시리즈 마지막 날이다. 다저스가 0-3으로 뒤지던 6회 초였다. 프리먼이 중월 솔로 홈런을 쳐냈다. 이날 팀의 유일한 득점이었다(경기는 1-3으로 끝났다). 다이아몬드를 도는 그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 속에는 어머니의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담겨 있었다.
오타니의 홈런에는 야유를 퍼붓던 토론토 팬들이다. 그러나 그의 홈런(시즌 2호)에는 조용하지만, 곳곳에서 따뜻한 박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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