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마드리드는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우승 DNA’를 갖고 있다.”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다른 클럽이라면 몰라도, 주체가 레알 마드리드라면 참일 성싶다. UCL 무대에서만큼은 빼어난 연기로 주인공 역을 도맡아 하니, 누가 뭐라고 토를 달기가 힘드니 말이다. ‘별들의 향연’인 UCL 막이 오르면, 우승 유전자가 발현돼 빅 이어를 들어 올리는 ‘왕중왕’이다. 막이 내리며 ‘리그 데 샹피옹(Ligue des Champions)’, 곧 UCL 앤섬(ANTHEM)이 울려 퍼질 때, 빅 이어를 치켜들고 등정의 환희를 만끽하는 으뜸의 명가인 레알 마드리드다.
이변(?)은 없었다. 역시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축구 2023-2024시즌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난해 6월 27일(이하 현지 일자)부터 올 6월 1일까지 1년 가까이 펼쳐진 대장정(예선 포함)에서, 마지막 승자의 포효를 터뜨렸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2-0으로 완파하고 웸블리 스타디움을 환호와 작약의 한마당으로 만들었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라리가 최고 명문이다. 최다(36회) 우승이 입증하듯 최강의 관록을 쌓아 왔다. 1929년 발원한 라리가에서, 어깨를 견줄 클럽이 없다.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라리가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바르셀로나조차 우승(27회) 횟수에서는 한참 떨어진다. 그만큼 라리가에서도 강한 우승 유전자를 발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UCL 우승 DNA를 갖고 있다고 더욱 강조되는 까닭이 존재한다. 라리가에서 정상을 밟지 못하는 시즌에도 유독 UCL에서만큼은 괴력을 뽐내며 패권을 품에 안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무대인 라리가보다 오히려 유럽 각국의 내로라하는 강호들이 야망을 불사르는 UCL에서 한결 빼어난 전과를 올린 레알 마드리드다.
UCL의 연원은 1955-1956시즌 첫 잔을 띄운 유러피언컵(유럽 챔피언 클럽 대회)이다. 1992-1993시즌 UCL로 이름을 바꿔 재출범했다. 2023-2024시즌까지 69회 빅이어를 쟁취하려는 뜨거운 각축이 펼쳐진 대전장에서, 가장 많이 야망을 이루고 득의의 대소(大笑)를 터뜨린 팀이 곧 레알 마드리드였다. 이번 시즌까지 열다섯 번 유럽 축구 천하를 평정했다. 그동안 가장 밝은 빛을 내뿜는 으뜸 별로 자리하려던 숱한 팀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두 자릿수 등정을 이뤘다. 4.6년마다 정상에 올랐다. 실로, 대단한 우승 주기다.
단연 발군의 전과라 아니할 수 없다. 최다 우승 횟수에서, 각각 2위와 3위에 오른 AC 밀란(7회)과 바이에른 뮌헨(6회)을 2배 이상 따돌린 압도적 성과다. 추격자들로선 감히 엄두조차 내기 힘든 족탈불급의 형세다.
단순히 우승 횟수에서 비롯한 ‘우승 DNA론’이 아니다. 속된 말로, 라리가에서 죽을 쑨 시즌에도 UCL에서만큼은 더욱더 기세를 돋워 정상까지 내달린 데서 유추한 명제다. 마치 UCL이 자신의 안마당인 양 맘껏 활기찬 몸놀림을 과시한 레알 마드리드다.
객관적 수치로 입증된다. 한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가 UCL과 라리가를 모두 석권한 적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 고작 5회(1956-1957, 1957-1958, 2016-2017, 2021-2022, 2023-2024시즌)다. UCL 우승 경력의 ⅓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열 번은 라리가에서 패권을 놓쳤으나, UCL에선 유럽 천하를 굽어봤다(표 참조).
마드리드는 유러피언컵이 첫걸음을 내디딘 1955-1956시즌부터 1959-1960시즌까지 5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물론, 지금까지 다른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위업이다. 그런데 이 절정의 시기에도, 라리가 우승까지 휩쓸었던 시즌은 두 번(1956-1957, 1957-1958)에 그친다. 남은 세 시즌은 바르셀로나에 두 번(1958-1959, 1959-1960시즌), 아틀레틱 빌바오에 한 번(1955-1956시즌) 우승컵을 내줬다.
심지어 라리가에선 5위라는, 레알 마드리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몰락을 겪은 1999-2000시즌에도 UCL에선 우승의 개가를 올렸다. 이 시즌 라리가에선, 레알 마드리드는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레알 사라고사의 뒤통수만을 하릴없이 쳐다만 봐야 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UCL 절대 지존’의 위용을 떨침에 따라, 그 구성원들은 ‘후광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감독, 선수, 그리고 회장까지 최다 우승 기록을 향유하고 있다.
먼저 최다 우승 사령탑 목록에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맨 윗자리에 앉아 있다. AC 밀란을 지휘하며 2회(2002-2003, 2006-2007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3회(2013-2014, 2021-2022, 2023-2024시즌) 등 총 5회의 우승을 일궜다. 밥 페이즐리 전 리버풀 감독(3회: 1976-1977, 1977-1978, 1980-1981시즌)보다 두 걸음 앞선다.
당연히, 선수도 레알 마드리드 몫이다. 이번 시즌 빅 이어를 안으며, 다니 카르바할과 루카 모드리치는 최다 타이틀 획득 반열에 올랐다. 6회로, 유러피언컵 시절 같은 횟수 타이틀을 따낸 프란시스코 헨토와 나란히 선수 그룹을 형성했다. 헨토가 ‘하얀 군단(Los Blancos: 레알 마드리드 애칭)의 일원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셋 모두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여섯 번 빅 이어에 입맞춤했다.
클럽 수장 순위에서도,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이번 시즌 우승에 힘입어 선두에 올랐다. 2001-2002시즌에 첫발을 뗀 이래 이번 시즌까지 일곱 번씩이나 빅 이어를 품에 안았다. 2위도 역시 레알 마드리드 수장이다. 5연패 시절의 영화를 이끌며 지금의 레알 마드리드 반석을 놓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전 회장(6회)이 이번 시즌 전까지 공동 선두였다.
페레스 회장은 두 차례(2000~2007년, 2009-2018년) ‘은하 군단(Galacticos)’을 만들어 또다시 전성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이달 당대 최고 공격수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킬리안 음바페를 영입한 데서 엿볼 수 있듯 ‘스타 수집광’으로 불리는 페레스 회장의 적극적 투자 정책과 UCL 우승 DNA는 밑바탕에서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