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하수정 기자] "결국 세상은 김 부장만 기억할 겁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권총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태. 적어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대 변곡점으로, 총을 쏜 김재규와 암살 당한 박정희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았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재규의 부하 직원들은 철저히 잊혀졌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가 재판을 받고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사형 당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나면, 위의 대사가 더욱 슬프게 들린다.
김재규의 부하 중에서 수행비서관이자 육군 대령 박흥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행복의 나라'(감독 추창민, 제공배급 NEW, 제작 파파스필름·오스카10스튜디오)다. 박흥주 대령은 좌우 이념을 떠나 인간적으로 훌륭한 성품에 참 군인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라고.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인물 박태주(故 이선균 분)를 만들었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나타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분)와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행복의 나라'는 10·26 사건과 12·12군사반란 사이, 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을 담았는데, 재판이 실시간으로 도청돼 판사에게 쪽지로 지시가 내려져 일명 '쪽지 재판'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때 쪽지로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다. 영화에선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분)로 등장한다.
정인후와 군 검찰단 검사 백승기(최원영 분)는 박태주의 행동을 두고 '내란의 사전 공모인지,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인지'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인다. 그러나 박태주에게 유리한 증인의 진술은 삭제되고, 재판 중에도 수시로 쪽지가 오간다. 정인후는 판사에게 가는 쪽지를 가로채면서 "이럴 거면 재판을 왜 하는 겁니까?"라고 분노하지만, 거대한 권력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 게다가 동료 변호사들은 가족까지 협박을 받자 하나, 둘 떠나간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정인후, 그날의 유일한 증인 육군 참모총장 정진후(이원종 분)를 찾아가 법정 증인석에 서 달라고 부탁한다. 참모총장 정진후는 단칼에 거절하고 정인후를 쫓아내지만, 이후 정인후의 진심을 알게 되고, 전상두를 견제하기 위해 증인석에 서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증인 출석 하루 전날, 12·12군사반란이 터지고 전상두가 정권을 잡으면서 일말의 희망도 꺾여버린다.
밀실에서 재판을 도청하며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합수부장 전상두는 전두환을 기반에 두고 있지만, '서울의 봄' 전두광과는 사뭇 다르다. 두 영화에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는 과정이 똑같이 등장하는데, '행복의 나라'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사건을 그대로 따라가고, '서울의 봄'은 깊숙히 들어가 좀 더 긴박하고 세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서울의 봄' 전두광은 다혈질의 불 같은 악인으로 그렸는데, '행복의 나라' 전상두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서늘한 인간으로 묘사했다.
'행복의 나라' 대부분의 캐릭터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는데, 가장 분량이 많은 주인공 정인후만 100% 가공해서 탄생한 점도 흥미롭다. 박태주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정인후는 창작된 캐릭터로, 당시의 재판 기록들과 재판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최근 200만을 돌파한 '파일럿'에서 여장남자로 코믹 연기를 선보인 조정석은 극과 극의 변신으로 놀라운 연기력을 증명한다.
올여름 극장가에는 이선균의 유작 두 편이 공개됐는데, 그중 '행복의 나라'가 마지막 작품이다. 대사가 극도로 적은 역할을 맡아 섬세한 표정과 감정 등으로 박태주를 완성했고, 특히 마지막 클로즈업 장면은 큰 여운과 울컥함을 더한다. 생전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고, 연기까지 잘했기에 더이상 그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8월 1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124분.
/ hsjssu@osen.co.kr
[사진] 영화 포스터 및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