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연휘선 기자] 배우 현빈이 울면서 연기할 만 했다. 동양평화를 위해 의거를 실행한 독립운동가이자 참군인, 적장에게도 밀정에게도 나름의 소신으로 기회를 줄 줄 알았던 소신을 가진 의인. 영화 '하얼빈'이 그려낸 안중근 장군의 신념이 혼란스러운 연말연시, 관객들에게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 제공/배급 CJ ENM,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이 새해 첫 날인 1일부터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지난달 24일 개봉해 연말연시라는 극장가 대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 사태와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여파로 대중의 관심이 극장에서 더욱 멀어진 상황. 그럼에도 '하얼빈'은 8일째 예매율 1위를 기록했다.
'하얼빈'은 1909년,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이들과 이를 쫓는 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추적과 의심을 그린 작품이다. 단지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라는 한 사건 뿐만 아니라 의거가 벌어진 장소 하얼빈을 향해 달려가는 안중근(현빈 분)을 위시한 독립군 대한의군 세력과 이를 저지하고 막으려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 그 사이 변절자이거나 외면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영화는 최대한 중립적인 시각에서 담아내는 듯 하다.
공교롭게도 개봉마저 심란한 시기, '하얼빈'의 중심에 있는 안중근 장군이라는 독립운동가의 신념이 관객들에게 울림을 남기고 있다. '안중근 의사'로 너리 알려진 그이지만, 안중근은 영화내내 독립을 위해 싸운 대한의군 중장으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 저변에는 단순히 군인, 독립군이라는 조직을 구성하는 한 개인이 아닌 대한의 독립으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싶은 한 명의 사상가가 있다.
영화의 시작인 신아산 전투에서 안중근이 이끄는 대한의군은 기습으로 승리를 거두고 적장 모리 다쓰오(박훈 분)를 사로잡지만, 안중근은 그를 전쟁 포로 자격으로 석방한다. 비록 또 다른 독립군 이창섭(이동욱 분)이 말한 대로 "만국공법이 대포 한 발에 무너졌다"는 시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염원하는 당시의 고국 조선이 '야만'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침략자인 일본은 야만이고, 이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려는 조선의 독립군이 정의라는 신념은 나약해 보이지만 안중근이라는 동양평화 사상가를 지탱하는 가장 뜨거운 무기였다. 실제 안중근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죄로 투옥 중인 가운데 동양평화론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기도 한 바. 적장을 놔주고 내부의 밀정에게도 기회를 주는 영화 '하얼빈' 속 안중근의 리더십은 2025년을 맞은 현재 대한민국에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적군과 아군 모두가 진흙탕을 굴러 피아식별조차 어려운 진창을 굴러야 하는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야만의 시대, 침략자들이 우월주의에 빠져 살인과 고문마저 정당화하던 때에 '하얼빈'의 안중근은 평화를 울부짖었다. 군인으로서 전투를 이끌던 장수인 그가 대규모 사상자를 낼 수 있는 전투가 아닌 일제의 당시 수괴였던 이토 히로부미 1명 만을 암살하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인정하며 재판장에서 저격의 이유까지 직접 피력했다.
이에 '하얼빈'은 기대나 예측을 뛰어넘고 메말랐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잔잔한 감정선을 끌고 간다. 단순히 신파와 '국뽕'을 배제했다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안중근 장군의 사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단순히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넘어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독립을 꿈꾸는, 영화가 극적으로 담아낸 대자연 만큼이나 웅대한 포부와 그릇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얼빈'의 안중근이다.
이쯤 되면 배우 현빈이 아내인 손예진이 걱정할 정도로 눈물까지 보이며 연기를 위해 고뇌하고 부담감에 시달렸다는 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더불어 갈망하게 만든다. 납득하기 힘든 계엄령의 국민의 대표에게 총구를 겨누게 하고, 위로조차 사치인 듯한 참사가 발생한 2020년대의 중반. 이러한 소신과 신념을 가진 리더를 만나고 싶다고. 주권도 되찾았고 제국주의는 퇴장했지만 여전히 2025년의 안중근 장군을 찾게 만드는 '하얼빈'이다.
/ monamie@osen.co.kr
[사진] 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