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2018년 메이저리그(MLB)의 첫 일주일은 그야말로 ‘오타니 신드롬’이 지배한 모습이었다. 시범경기의 부진으로 많은 전문가에게 우려 섞인 말을 들어야 했던 오타니 쇼헤이. 그러나 MLB 개막 첫 2주간 그는 타자로 3홈런 8타점에 OPS 1.189를, 투수로는 2경기 2승에 평균자책점 2.08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다. (4월 17일 기준) 오타니는 데뷔 첫 주에 ‘이주의 선수’ 선정이라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사실 오타니가 이렇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시 ‘투타 겸업’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재 그의 성적은 투수와 타자로 반을 갈라도 훌륭한 성적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한 사람이 투수와 타자로 동시에 거두고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가 되었다.
‘이도류’는 ‘양날의 검’이다. 잘한다면 로스터 활용에도 유리할뿐더러 덤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다. 그러나 과장을 섞어 학창시절 ‘4번타자 겸 에이스’였던 선수만이 온다는 프로에서 왜 투타 겸업이 일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외 토픽감이 되었을까? 체력관리가 어렵고, 한쪽의 재능을 제대로 쓰지 못할 수도 있는 투타 겸업은 현대 야구에서 사실상 사장되었다. 두 마리 토끼 잡다가 잡은 토끼도 놓치는 것보단 한 마리라도 잘 잡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올 시즌 입단한 kt wiz의 강백호가 투타 겸업을 시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강백호는 서울고 재학 시절 타자로는 홈런을 날렸고 투수로는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패스트볼을 가진 선수였다. 어느 하나 포기하기에 아까운 재능이었기에 또 한 번 이도류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KT 김진욱 감독은 “타격을 보면 타자로 집중해도 될 것 같다”며 타자로 역할을 정해주었다.
그렇다면 이도류는 만화 속에서, 혹은 다른 나라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일까. 낡은 책상 서랍 속에서 꺼낸 30년 전의 야구 역사를 꺼내어 보자. 우리나라에도 분명 존재했던 이도류, 그 선수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타니 이전의 원조 이도류, 김성한
KBO 리그의 투타 겸업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오리 궁뎅이’ 김성한이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재능이 많았던 김성한은 프로야구 최초의 30홈런, 최초의 20(홈런)-20(도루) 기록자이다. 그리고 또 하나, 프로야구 최초이자 최후의 10(승)-10(홈런) 달성자이기도 하다. 한 시즌은커녕 커리어 전체로도 10-10을 기록한 선수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군산상고 시절 투수였던 김성한은 동국대 진학 후 팔꿈치 통증을 느끼며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뛰기 시작했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그는 입단 당시에는 타자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창단 당시 15명의 선수로만 출발한 해태는 투수도 이상윤, 김용남, 방수원, 강만식, 신태중 5명으로만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해태 창단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은 김성한에게 투수로도 나설 것을 지시했다.
본인은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꺼렸던 투수였지만 재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3루수로 나갔다가 구원등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선발투수로 등판해 완봉승을 거뒀다.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는 활약이었다. 김성한은 1982년 전반기에 타자로는 9홈런(3위) 39타점(1위)을, 투수로는 9승(공동 2위) 5패 1세이브 2.65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했다. 재능이 너무 많은 것을 하늘이 시기한 탓일까(?), 첫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그는 전체 3위에 해당하는 29,374표를 받았지만(1위 김봉연 33,548표) 투표수가 투수, 지명타자, 3루수로 분산되면서 베스트 10 진입에 실패했다.
1982년을 투타 겸업으로 보낸 김성한은 1983년부터는 타자로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투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83년 6월, 해태와 삼미의 전기리그 우승을 가리는 승부에 선발로 등판한 김성한은 깜짝 완봉승을 거두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1985년 40.1이닝에서 평균자책점 3.35를 기록한 후 이듬해 3이닝에서 1패를 기록하며 투수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비운의 천재, 박노준과 김정수
앞서 김성한을 ‘재능 많은 선수’로 소개했지만 당시 천재라 불리던 선수는 따로 있었다. 야구계 최초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박노준이 그 주인공이다. 선린상고 시절부터 이미 팬을 이끌고 다녔던 박노준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성인대표팀에 뽑히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1986년에 입단한 신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고 OB 베어스에 들어간 그는 타자로 입단했지만 김광림, 김형석 등 좌타자가 많았던 팀 사정상 투수도 겸업했다. 아니, 투수로 더 많이 나왔다.
박노준은 당시 신인 가운데 두 번째로 낮은 2.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원래 하기로 했던 타자로는 54타석에서 단 9안타만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었다. 김성근 감독 체제하에서 2년간 투타 겸업을 하며 방황했던 그는 1989년이 되어 주전 중견수로 자리를 잡았고, 쌍방울 레이더스 이적 후인 1994년에는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수상했다.
박노준은 프로에서 골든글러브도 차지하고 36세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선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려대 3년 선배였던 김정수는 그야말로 ‘비운의 선수’였다. 신일고 시절에는 에이스로, 고려대 시절에는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김정수는 지금도 명승부로 손꼽히는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우승결정전에서 8회 대타로 나와 추격의 3루타를 치기도 했다.
프로에 입단 후 타자로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김정수는 1985년을 앞두고 투수 변신을 시도했다. 투수로 15경기에 출장, 2번의 완투와 2승, 평균자책점 2.70을 거둔 그는 타석에서도 홈런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KBO 리그 36년 역사에서 한 시즌에 승리투수와 홈런타자를 모두 기록한 선수는 김성한, 김재박, 그리고 김정수 단 셋 뿐이다. 이후 1986년을 통째로 결장한 김정수는 이해 11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정수의 차량에 동승했던 안언학 역시 1985년 108타석 – 15이닝을 기록했다.)
투타 겸업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해 1986년의 박노준 이후 KBO 리그에서 풀 시즌을 투타 겸업했던 선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면서 정확한 의미의 겸업 대신 투수 ↔ 타자 전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투수나 타자 쪽에서 프로 입단 후 어느 정도 기록을 쌓은 뒤에 전향한 선수들이 있다.
먼저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에 성공한 사례는 권준헌이 있다. 1995년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올스타전 감독추천선수로도 뽑힌 권준헌은 이후 수비 불안과 타격 침체로 인해 주전에서 밀려났다. 이후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투수로 전향한 권준헌은 2002년 12홀드, 2004년 17세이브를 기록하며 구원투수로 활약했다.
그 반대의 사례로는 김인철을 꼽을 수 있다. 1992년에 선발로 23번 등판, 8승을 거두는 등 프로에서 117경기에 투수로 등판했던 김인철은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2000년부터 타자로 전향했다. 롯데 자이언츠와 KIA 타이거즈를 거쳐 200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그는 그해 타율 0.275, 10홈런, 39타점을 기록하며 34세의 나이에 타자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권준헌과 김인철은 KBO 리그에서 둘 뿐인 투수 100경기-타자 100경기 출장선수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도류’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4월 11일의 MBC전에는 어이없게도 1루수 김경남이 선발 투수로 등판, 우리를 놀라게 했다. 삼미가 아닌, 평범하고 상식적인 팀이라면 ‘그런 법이 어디 있나?’ 하고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이미 상식의 범주를 초월한 우리의 삼미는 ‘그러지 말란 법은 또 어디 있느냐?’라는 초연한 자세로 홀연히 1루수를 마운드에 내세웠다.”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中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타자가 투수로 올라오는 것이 삼미만의 전유물로 묘사했다. 물론 삼미가 별났던 것은 맞지만 프로 원년에는 가끔 있었던 사건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해태 ‘3루수’ 김성한은 3번의 완투를 했고, 롯데 ‘투수’ 이윤섭은 타자로 33타석 1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느슨했고, 선수층이 두껍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왜 투타 겸업 선수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역시 부상 위험성이 가장 큰 이유다. 10승-10홈런의 주인공 김성한은 투수로 무리했던 것이 팔꿈치 통증을 불러왔고 수년이 지난 1991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아야 했다. 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치고 바로 투수 전향을 했던 심재학은 시즌 내내 어깨가 아팠고 결국 한 시즌 만에 타자로 돌아왔다.
또한 투타 겸업으로 선수 재능이 희미해지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박노준의 경우 투수와 타자 두 영역에서 모두 재능이 있던 선수였지만 투타 겸업을 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되었고, 타자로 역할을 완전히 고정한 1989년 이후에야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로스터의 확대와 선수 숫자의 증가로 인해 투타 겸업을 할 정도로 선수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도류, 현실과 낭만 사이
위에서 보았듯이 이도류는 현실적인 이유로 현대 야구에서 사라지고 있는 흐름이다. 재능이 있어도 프로에서 성공하기는 녹록지 않고, 좀 더 좋은 재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프로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가끔은 타자로 전향한 나성범처럼 쉽게 생각하지 못한 재능을 끌어내어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도류는 낭만이다. 냉정히 말해 일본에서 최상급의 성적을 꾸준히 거두진 못한 오타니가 일본 열도의 스타가 되고 미국까지 진출한 것도 결국은 투수와 타자 모두에서 잠재성을 지녔고, 그것이 프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오타니를 향해 ‘만화 같다’고 표현하는 것도 결국 이도류가 낭만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만화 같을 순 없지만, 만화가 현실에 내려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언젠가 등장할 한국의 또 다른 이도류를 기대해본다.
기록 출처: STATIZ, KBO 기록실
야구공작소
양정웅 칼럼니스트 / 에디터=이예림
사실 오타니가 이렇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시 ‘투타 겸업’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재 그의 성적은 투수와 타자로 반을 갈라도 훌륭한 성적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한 사람이 투수와 타자로 동시에 거두고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가 되었다.
‘이도류’는 ‘양날의 검’이다. 잘한다면 로스터 활용에도 유리할뿐더러 덤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다. 그러나 과장을 섞어 학창시절 ‘4번타자 겸 에이스’였던 선수만이 온다는 프로에서 왜 투타 겸업이 일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외 토픽감이 되었을까? 체력관리가 어렵고, 한쪽의 재능을 제대로 쓰지 못할 수도 있는 투타 겸업은 현대 야구에서 사실상 사장되었다. 두 마리 토끼 잡다가 잡은 토끼도 놓치는 것보단 한 마리라도 잘 잡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올 시즌 입단한 kt wiz의 강백호가 투타 겸업을 시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강백호는 서울고 재학 시절 타자로는 홈런을 날렸고 투수로는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패스트볼을 가진 선수였다. 어느 하나 포기하기에 아까운 재능이었기에 또 한 번 이도류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KT 김진욱 감독은 “타격을 보면 타자로 집중해도 될 것 같다”며 타자로 역할을 정해주었다.
그렇다면 이도류는 만화 속에서, 혹은 다른 나라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일까. 낡은 책상 서랍 속에서 꺼낸 30년 전의 야구 역사를 꺼내어 보자. 우리나라에도 분명 존재했던 이도류, 그 선수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타니 이전의 원조 이도류, 김성한
KBO 리그의 투타 겸업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오리 궁뎅이’ 김성한이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재능이 많았던 김성한은 프로야구 최초의 30홈런, 최초의 20(홈런)-20(도루) 기록자이다. 그리고 또 하나, 프로야구 최초이자 최후의 10(승)-10(홈런) 달성자이기도 하다. 한 시즌은커녕 커리어 전체로도 10-10을 기록한 선수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군산상고 시절 투수였던 김성한은 동국대 진학 후 팔꿈치 통증을 느끼며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뛰기 시작했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그는 입단 당시에는 타자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창단 당시 15명의 선수로만 출발한 해태는 투수도 이상윤, 김용남, 방수원, 강만식, 신태중 5명으로만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해태 창단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은 김성한에게 투수로도 나설 것을 지시했다.
본인은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꺼렸던 투수였지만 재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3루수로 나갔다가 구원등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선발투수로 등판해 완봉승을 거뒀다.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는 활약이었다. 김성한은 1982년 전반기에 타자로는 9홈런(3위) 39타점(1위)을, 투수로는 9승(공동 2위) 5패 1세이브 2.65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했다. 재능이 너무 많은 것을 하늘이 시기한 탓일까(?), 첫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그는 전체 3위에 해당하는 29,374표를 받았지만(1위 김봉연 33,548표) 투표수가 투수, 지명타자, 3루수로 분산되면서 베스트 10 진입에 실패했다.
1982년을 투타 겸업으로 보낸 김성한은 1983년부터는 타자로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투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83년 6월, 해태와 삼미의 전기리그 우승을 가리는 승부에 선발로 등판한 김성한은 깜짝 완봉승을 거두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1985년 40.1이닝에서 평균자책점 3.35를 기록한 후 이듬해 3이닝에서 1패를 기록하며 투수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비운의 천재, 박노준과 김정수
앞서 김성한을 ‘재능 많은 선수’로 소개했지만 당시 천재라 불리던 선수는 따로 있었다. 야구계 최초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박노준이 그 주인공이다. 선린상고 시절부터 이미 팬을 이끌고 다녔던 박노준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성인대표팀에 뽑히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1986년에 입단한 신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고 OB 베어스에 들어간 그는 타자로 입단했지만 김광림, 김형석 등 좌타자가 많았던 팀 사정상 투수도 겸업했다. 아니, 투수로 더 많이 나왔다.
박노준은 당시 신인 가운데 두 번째로 낮은 2.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원래 하기로 했던 타자로는 54타석에서 단 9안타만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었다. 김성근 감독 체제하에서 2년간 투타 겸업을 하며 방황했던 그는 1989년이 되어 주전 중견수로 자리를 잡았고, 쌍방울 레이더스 이적 후인 1994년에는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수상했다.
박노준은 프로에서 골든글러브도 차지하고 36세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선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려대 3년 선배였던 김정수는 그야말로 ‘비운의 선수’였다. 신일고 시절에는 에이스로, 고려대 시절에는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김정수는 지금도 명승부로 손꼽히는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우승결정전에서 8회 대타로 나와 추격의 3루타를 치기도 했다.
프로에 입단 후 타자로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김정수는 1985년을 앞두고 투수 변신을 시도했다. 투수로 15경기에 출장, 2번의 완투와 2승, 평균자책점 2.70을 거둔 그는 타석에서도 홈런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KBO 리그 36년 역사에서 한 시즌에 승리투수와 홈런타자를 모두 기록한 선수는 김성한, 김재박, 그리고 김정수 단 셋 뿐이다. 이후 1986년을 통째로 결장한 김정수는 이해 11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정수의 차량에 동승했던 안언학 역시 1985년 108타석 – 15이닝을 기록했다.)
투타 겸업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해 1986년의 박노준 이후 KBO 리그에서 풀 시즌을 투타 겸업했던 선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면서 정확한 의미의 겸업 대신 투수 ↔ 타자 전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투수나 타자 쪽에서 프로 입단 후 어느 정도 기록을 쌓은 뒤에 전향한 선수들이 있다.
먼저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에 성공한 사례는 권준헌이 있다. 1995년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올스타전 감독추천선수로도 뽑힌 권준헌은 이후 수비 불안과 타격 침체로 인해 주전에서 밀려났다. 이후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투수로 전향한 권준헌은 2002년 12홀드, 2004년 17세이브를 기록하며 구원투수로 활약했다.
그 반대의 사례로는 김인철을 꼽을 수 있다. 1992년에 선발로 23번 등판, 8승을 거두는 등 프로에서 117경기에 투수로 등판했던 김인철은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2000년부터 타자로 전향했다. 롯데 자이언츠와 KIA 타이거즈를 거쳐 200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그는 그해 타율 0.275, 10홈런, 39타점을 기록하며 34세의 나이에 타자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권준헌과 김인철은 KBO 리그에서 둘 뿐인 투수 100경기-타자 100경기 출장선수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도류’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4월 11일의 MBC전에는 어이없게도 1루수 김경남이 선발 투수로 등판, 우리를 놀라게 했다. 삼미가 아닌, 평범하고 상식적인 팀이라면 ‘그런 법이 어디 있나?’ 하고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이미 상식의 범주를 초월한 우리의 삼미는 ‘그러지 말란 법은 또 어디 있느냐?’라는 초연한 자세로 홀연히 1루수를 마운드에 내세웠다.”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中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타자가 투수로 올라오는 것이 삼미만의 전유물로 묘사했다. 물론 삼미가 별났던 것은 맞지만 프로 원년에는 가끔 있었던 사건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해태 ‘3루수’ 김성한은 3번의 완투를 했고, 롯데 ‘투수’ 이윤섭은 타자로 33타석 1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느슨했고, 선수층이 두껍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왜 투타 겸업 선수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역시 부상 위험성이 가장 큰 이유다. 10승-10홈런의 주인공 김성한은 투수로 무리했던 것이 팔꿈치 통증을 불러왔고 수년이 지난 1991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아야 했다. 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치고 바로 투수 전향을 했던 심재학은 시즌 내내 어깨가 아팠고 결국 한 시즌 만에 타자로 돌아왔다.
또한 투타 겸업으로 선수 재능이 희미해지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박노준의 경우 투수와 타자 두 영역에서 모두 재능이 있던 선수였지만 투타 겸업을 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되었고, 타자로 역할을 완전히 고정한 1989년 이후에야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로스터의 확대와 선수 숫자의 증가로 인해 투타 겸업을 할 정도로 선수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도류, 현실과 낭만 사이
위에서 보았듯이 이도류는 현실적인 이유로 현대 야구에서 사라지고 있는 흐름이다. 재능이 있어도 프로에서 성공하기는 녹록지 않고, 좀 더 좋은 재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프로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가끔은 타자로 전향한 나성범처럼 쉽게 생각하지 못한 재능을 끌어내어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도류는 낭만이다. 냉정히 말해 일본에서 최상급의 성적을 꾸준히 거두진 못한 오타니가 일본 열도의 스타가 되고 미국까지 진출한 것도 결국은 투수와 타자 모두에서 잠재성을 지녔고, 그것이 프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오타니를 향해 ‘만화 같다’고 표현하는 것도 결국 이도류가 낭만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만화 같을 순 없지만, 만화가 현실에 내려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언젠가 등장할 한국의 또 다른 이도류를 기대해본다.
기록 출처: STATIZ, KBO 기록실
야구공작소
양정웅 칼럼니스트 / 에디터=이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