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지난 10월 6일, 일본 야구계의 전설로 불리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향년 86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과 일본의 여러 정계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생전의 그는 야구만이 아닌 일본의 전반적인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현역 시절 ‘덴노(천황)’라고 불릴 만큼 5~60년대 일본 야구를 주름잡았고 은퇴한 뒤에도 야구계 대표 인사로 활동했다.
글의 제목을 보고 의아한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한 레전드였지만 그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굳이 한국인이라 콕 집어 말하는 이유가 있다. 가네다 마사이치, 그의 피는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이다.
가네다의 위대함
먼저 가네다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알아보려 한다. 그의 기록은 짚고 갈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가네다의 기록은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대부분 마일스톤을 달성한 시점이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타 나가시마 시게오 등 다른 레전드와 대결했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 때문에 그의 통산 성적을 다른 선수들이나 시대적으로 비교해보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통상적인 이야기나 업적이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가네다의 위상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있다. 승리와 패배, 완투, 투구 이닝, 삼진, 볼넷 모두 역대 1위다. 그가 커리어 내내 뛰었던 센트럴 리그로 범위를 좁히면 그의 위상은 더욱 올라간다. NPB 공식 홈페이지에서 통상적으로 순위를 따지는 투수 기록 카테고리는 21개. 이 21개 중 가네다는 6개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센트럴 리그로만 한정하면 무려 11개가 된다. 메이저리그의 전설 중 하나로 불리는 사이 영이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28개 카테고리에서 8개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네다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가네다의 생년월일은 1933년 8월 1일이다. 그런 그가 프로야구에 데뷔한 날짜는 1950년 8월 23일. 17세 생일이 갓 지나자마자 프로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셈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프로에 뛰어든 셈인데, 이는 당시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가 시작된 1965년부터는 당연히 없었으며 이전에도 그만큼 앳된 나이에 프로 무대를 밟은 선수는 없었다.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는 1940년대에 만 15세의 나이로 한 게임을 뛰었던 조 넉스홀이 있었지만 이외에는 거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만큼 가네다의 데뷔는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그는 프로로서 20년을 뛰고 만 35세의 나이에 은퇴한다. 그것도 부상이나 혹사로 인한 퇴장이 아닌 오직 자의에 의한 명예로운 작별이었다.
*레전드 투수 중 한 명으로 남아있는 밥 펠러의 경우 가네다와 같은 만 17세에 데뷔했지만 약 250일이 더 늦었던 데다가 그 당시엔 고등학교와 프로 야구를 병행하던 터였다. 물론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네다와 같은 시기에 뛰었던 다른 레전드 투수들은 이름 있는 팀에서 뛰었다. 고야마 마사아키는 매년 강팀으로 꼽힌 한신-도쿄/롯데(현재의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이나오 가즈히사는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던 니시테츠(현재의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반면 가네다의 첫 팀인 고쿠테쓰(현재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그가 입단하던 해에 창단된 팀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리그 우승이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할 때 그의 손은 비어 있었다.
새로 창단된 팀의 대부분 그러하듯 고쿠테쓰는 매년 최하위를 맴돌았고, 가네다가 고쿠테쓰에서 뛰던 15년간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둔 건 1961년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승률 0.438을 기록한 팀에서 가네다는 353승 267패로 0.569의 승률을 기록하면서 약체팀의 대표 에이스로 기억됐다. 이 353승은 15년 동안 팀이 거둔 833승의 42.4%에 해당하는 대단한 수치다. 당시의 고쿠테쓰에서 가네다를 빼면 팀의 승률은 0.374로 수직 하락한다. 그가 없었으면 말 그대로 시체였던 팀이다.
가네다는 데뷔 시즌을 제외한 고쿠테쓰에서의 14년 동안 모두 20승 – 300이닝 – 200삼진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기록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는데, 가네다가 1964년 시즌이 끝나고 그 당시 프로야구 최강의 팀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당시 요미우리는 4시즌 동안 두 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고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려던 차였다. 이미 레전드급 대우를 받고 있던 가네다의 이적은 상당한 충격을 불러왔다. 활약은 이전만 못했지만 요미우리의 9연속 리그 – 일본 시리즈 우승, 이른바 V9 중 첫 다섯 번의 우승을 경험하는 등 고쿠테쓰에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요미우리에서 달성했다.
가네다를 이야기할 때 그가 컨디션이나 신체를 관리하던 방법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경기 전후로든 일반적인 훈련을 할 때 트레이닝이나 식단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던 시기에 그가 행했던 것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이후 여러 선수들이 이를 따라 하고 구단들도 앞장서서 선수 관리에 나서면서 가네다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남았다.
한국인 김경홍,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인의 피
앞에서 말했듯 가네다에겐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 정확하게는 그의 부모님이 모두 한국 출신이므로 완전한 한국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그의 출생지는 일본 아이치현이지만 출생 당시의 국적은 대한민국, 본적은 경상북도 상주였다. 이것은 가네다가 프로에 데뷔한 1950년 이후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생전의 인터뷰에서 그는, 프로야구에 발을 들일 때부터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려온 데다 일본 법무성에서의 계속된 압박으로 인해 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1959년 귀화 이후로 그는 일본의 국민으로 살았다.
이런 케이스는 비단 가네다뿐이 아니다. 이외에도 일본 프로야구를 휩쓴 한국계 선수들이 여럿 존재한다. 밑의 표를 보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반응을 예측한다. 알고 있었거나, 전혀 몰랐거나, 혹은 이 선수가 대한민국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에 펄쩍 뛰었거나.
가네다 이전 세대의 일본 프로야구 대표 에이스이자 레전드로 불리는 나카가미 히데오(개명 전 후지모토 히데오)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프로야구에 활약했던 가네다 마사야스 역시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일본 야구계의 역사에 강렬한 장면을 남겼다*. 또한 가네다 마사이치의 동생인 가네다 토메히로 역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 넷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일본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의 대기록을 남긴 장훈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가네다 마사야스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필자가 참고한 “조해연의 일본 프로야구”의 저자 조해연은 그를 경상북도 출신의 귀화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일본의 문헌에서는 그를 교토에서 태어난 정통 일본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네다 형제와 나카가미 히데오, 그리고 가네다 마사야스는 일본 정부의 압박 또는 일본인들의 시선에 못 이겨, 아니면 이미 그런 고초를 겪기 전에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그러나 야구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끝난 뒤 가네다 마사이치와 나카가미 히데오는 귀화를 후회하고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등 ‘참회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 장훈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그런 아픔을 감수하고 끝까지 한국인으로 남아 전설이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 프로야구 초기에 한국인으로서 뛴 유학진과 박현명이 있었다. 한국에 프로야구가 없던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타격왕과 베스트나인, 그리고 200홈런-200도루 클럽에 가입했던 백인천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 한국의 피를 안고 뛰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
칼럼 작성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뉘앙스의 기사를 발견했다.
“가네다 마사이치가 역대 최고의 레전드의 반열에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가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 또는 이전 세대 최고의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의 강렬한 산화 때문으로 그를 사와무라의 뒤편에 자리시켰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귀화한 그에게 큰 사랑을 보내지 않았다.”
사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이야기를 저렇게 태연히 쓸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먼저 사실 파악을 하기 전에 사와무라 에이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와무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당시 도쿄 교진군)의 초대 에이스이자 MVP, 3회의 노히터를 기록하는 등 일본 프로야구의 시작을 함께한 최고의 투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면서 기록 이상으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신화적인 인물로 남았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그해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은 사와무라 에이지 상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에게 사와무라가 가네다보다 더욱 뛰어난 투수로 칭송받는다는 게 사실이냐는 것이다.
*사와무라 에이지 상의 제정 연도는 1947년이다. 사이 영 상이 1956년에 만들어졌으니 ‘사와무라 상이 사이 영 상을 모방했다’라는 편견은 버리길 권한다.
지난 2018년 1월, 일본의 신문사 중 하나인 ‘NEWS 포스트 세븐’은 ‘역대 최고의 투수를 뽑아보자’는 목적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일반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압도적으로, 그것도 거의 8배에 가까운 득표수로 가네다가 사와무라를 압도했다. 더군다나 2위인 이나오 가즈히사와도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그를 과연 사와무라에 밀린 2인자로 평가할 수 있을까?
다만 저 기사의 마지막 말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사실 알 사람들이나 알 뿐 요즘 팬들은 가네다 마사이치, 김경홍이란 투수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번에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가네다가 한국에 방문하면서 왕성히 활동했던 1970년대에는 그의 이름이 한국에 널리 알려졌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네다 마사이치는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한국의 여느 레전드 이상의 업적과 명성을 쌓았지만 수십 년의 세월과 일본이라는 활동 무대의 차이로 인해 기억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귀화했다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사랑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를 넘어, 한국인의 피를 지니고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한 대투수의 ‘존재’를 그의 죽음으로야 겨우 알게 된 팬이 많다는 점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안타까움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글을 끝마치며,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야구공작소
김동민 칼럼니스트 / 에디터=조예은
출처=Baseball-Reference, npb.jp, NEWSポストセブン, “조해연, ‘조해연의 일본 프로야구’, 지성사, 2003”, “박동희, ‘나는 400승 투수 김경홍이다.’, 매거진S, 2011, 링크”
글의 제목을 보고 의아한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한 레전드였지만 그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굳이 한국인이라 콕 집어 말하는 이유가 있다. 가네다 마사이치, 그의 피는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이다.
가네다의 위대함
먼저 가네다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알아보려 한다. 그의 기록은 짚고 갈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가네다의 기록은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대부분 마일스톤을 달성한 시점이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타 나가시마 시게오 등 다른 레전드와 대결했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 때문에 그의 통산 성적을 다른 선수들이나 시대적으로 비교해보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통상적인 이야기나 업적이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가네다의 위상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있다. 승리와 패배, 완투, 투구 이닝, 삼진, 볼넷 모두 역대 1위다. 그가 커리어 내내 뛰었던 센트럴 리그로 범위를 좁히면 그의 위상은 더욱 올라간다. NPB 공식 홈페이지에서 통상적으로 순위를 따지는 투수 기록 카테고리는 21개. 이 21개 중 가네다는 6개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센트럴 리그로만 한정하면 무려 11개가 된다. 메이저리그의 전설 중 하나로 불리는 사이 영이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28개 카테고리에서 8개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네다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가네다의 생년월일은 1933년 8월 1일이다. 그런 그가 프로야구에 데뷔한 날짜는 1950년 8월 23일. 17세 생일이 갓 지나자마자 프로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셈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프로에 뛰어든 셈인데, 이는 당시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가 시작된 1965년부터는 당연히 없었으며 이전에도 그만큼 앳된 나이에 프로 무대를 밟은 선수는 없었다.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는 1940년대에 만 15세의 나이로 한 게임을 뛰었던 조 넉스홀이 있었지만 이외에는 거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만큼 가네다의 데뷔는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그는 프로로서 20년을 뛰고 만 35세의 나이에 은퇴한다. 그것도 부상이나 혹사로 인한 퇴장이 아닌 오직 자의에 의한 명예로운 작별이었다.
*레전드 투수 중 한 명으로 남아있는 밥 펠러의 경우 가네다와 같은 만 17세에 데뷔했지만 약 250일이 더 늦었던 데다가 그 당시엔 고등학교와 프로 야구를 병행하던 터였다. 물론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네다와 같은 시기에 뛰었던 다른 레전드 투수들은 이름 있는 팀에서 뛰었다. 고야마 마사아키는 매년 강팀으로 꼽힌 한신-도쿄/롯데(현재의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이나오 가즈히사는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던 니시테츠(현재의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반면 가네다의 첫 팀인 고쿠테쓰(현재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그가 입단하던 해에 창단된 팀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리그 우승이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할 때 그의 손은 비어 있었다.
새로 창단된 팀의 대부분 그러하듯 고쿠테쓰는 매년 최하위를 맴돌았고, 가네다가 고쿠테쓰에서 뛰던 15년간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둔 건 1961년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승률 0.438을 기록한 팀에서 가네다는 353승 267패로 0.569의 승률을 기록하면서 약체팀의 대표 에이스로 기억됐다. 이 353승은 15년 동안 팀이 거둔 833승의 42.4%에 해당하는 대단한 수치다. 당시의 고쿠테쓰에서 가네다를 빼면 팀의 승률은 0.374로 수직 하락한다. 그가 없었으면 말 그대로 시체였던 팀이다.
가네다는 데뷔 시즌을 제외한 고쿠테쓰에서의 14년 동안 모두 20승 – 300이닝 – 200삼진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기록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는데, 가네다가 1964년 시즌이 끝나고 그 당시 프로야구 최강의 팀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당시 요미우리는 4시즌 동안 두 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고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려던 차였다. 이미 레전드급 대우를 받고 있던 가네다의 이적은 상당한 충격을 불러왔다. 활약은 이전만 못했지만 요미우리의 9연속 리그 – 일본 시리즈 우승, 이른바 V9 중 첫 다섯 번의 우승을 경험하는 등 고쿠테쓰에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요미우리에서 달성했다.
가네다를 이야기할 때 그가 컨디션이나 신체를 관리하던 방법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경기 전후로든 일반적인 훈련을 할 때 트레이닝이나 식단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던 시기에 그가 행했던 것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이후 여러 선수들이 이를 따라 하고 구단들도 앞장서서 선수 관리에 나서면서 가네다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남았다.
한국인 김경홍,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인의 피
앞에서 말했듯 가네다에겐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 정확하게는 그의 부모님이 모두 한국 출신이므로 완전한 한국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그의 출생지는 일본 아이치현이지만 출생 당시의 국적은 대한민국, 본적은 경상북도 상주였다. 이것은 가네다가 프로에 데뷔한 1950년 이후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생전의 인터뷰에서 그는, 프로야구에 발을 들일 때부터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려온 데다 일본 법무성에서의 계속된 압박으로 인해 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1959년 귀화 이후로 그는 일본의 국민으로 살았다.
이런 케이스는 비단 가네다뿐이 아니다. 이외에도 일본 프로야구를 휩쓴 한국계 선수들이 여럿 존재한다. 밑의 표를 보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반응을 예측한다. 알고 있었거나, 전혀 몰랐거나, 혹은 이 선수가 대한민국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에 펄쩍 뛰었거나.
가네다 이전 세대의 일본 프로야구 대표 에이스이자 레전드로 불리는 나카가미 히데오(개명 전 후지모토 히데오)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프로야구에 활약했던 가네다 마사야스 역시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일본 야구계의 역사에 강렬한 장면을 남겼다*. 또한 가네다 마사이치의 동생인 가네다 토메히로 역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 넷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일본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의 대기록을 남긴 장훈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가네다 마사야스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필자가 참고한 “조해연의 일본 프로야구”의 저자 조해연은 그를 경상북도 출신의 귀화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일본의 문헌에서는 그를 교토에서 태어난 정통 일본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네다 형제와 나카가미 히데오, 그리고 가네다 마사야스는 일본 정부의 압박 또는 일본인들의 시선에 못 이겨, 아니면 이미 그런 고초를 겪기 전에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그러나 야구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끝난 뒤 가네다 마사이치와 나카가미 히데오는 귀화를 후회하고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등 ‘참회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 장훈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그런 아픔을 감수하고 끝까지 한국인으로 남아 전설이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 프로야구 초기에 한국인으로서 뛴 유학진과 박현명이 있었다. 한국에 프로야구가 없던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타격왕과 베스트나인, 그리고 200홈런-200도루 클럽에 가입했던 백인천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 한국의 피를 안고 뛰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
칼럼 작성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뉘앙스의 기사를 발견했다.
“가네다 마사이치가 역대 최고의 레전드의 반열에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가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 또는 이전 세대 최고의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의 강렬한 산화 때문으로 그를 사와무라의 뒤편에 자리시켰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귀화한 그에게 큰 사랑을 보내지 않았다.”
사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이야기를 저렇게 태연히 쓸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먼저 사실 파악을 하기 전에 사와무라 에이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와무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당시 도쿄 교진군)의 초대 에이스이자 MVP, 3회의 노히터를 기록하는 등 일본 프로야구의 시작을 함께한 최고의 투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면서 기록 이상으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신화적인 인물로 남았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그해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은 사와무라 에이지 상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에게 사와무라가 가네다보다 더욱 뛰어난 투수로 칭송받는다는 게 사실이냐는 것이다.
*사와무라 에이지 상의 제정 연도는 1947년이다. 사이 영 상이 1956년에 만들어졌으니 ‘사와무라 상이 사이 영 상을 모방했다’라는 편견은 버리길 권한다.
지난 2018년 1월, 일본의 신문사 중 하나인 ‘NEWS 포스트 세븐’은 ‘역대 최고의 투수를 뽑아보자’는 목적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일반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압도적으로, 그것도 거의 8배에 가까운 득표수로 가네다가 사와무라를 압도했다. 더군다나 2위인 이나오 가즈히사와도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그를 과연 사와무라에 밀린 2인자로 평가할 수 있을까?
다만 저 기사의 마지막 말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사실 알 사람들이나 알 뿐 요즘 팬들은 가네다 마사이치, 김경홍이란 투수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번에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가네다가 한국에 방문하면서 왕성히 활동했던 1970년대에는 그의 이름이 한국에 널리 알려졌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네다 마사이치는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한국의 여느 레전드 이상의 업적과 명성을 쌓았지만 수십 년의 세월과 일본이라는 활동 무대의 차이로 인해 기억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귀화했다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사랑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를 넘어, 한국인의 피를 지니고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한 대투수의 ‘존재’를 그의 죽음으로야 겨우 알게 된 팬이 많다는 점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안타까움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글을 끝마치며,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야구공작소
김동민 칼럼니스트 / 에디터=조예은
출처=Baseball-Reference, npb.jp, NEWSポストセブン, “조해연, ‘조해연의 일본 프로야구’, 지성사, 2003”, “박동희, ‘나는 400승 투수 김경홍이다.’, 매거진S, 2011,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