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뉴스 | 한해선 기자]
"원작 드라마를 우연히 봤는데, 많은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사용하지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내레이션이 2화 엔딩에서 나오는데 가슴을 후려치더라고요. 그 느낌 때문에 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배우 정우성의 음성을 내레이션으로만 들을 수 있는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작품이 나왔다. 청각장애인 역할을 한 정우성이 생경하지만 그가 준 저릿한 정통 멜로의 울림은 컸다. 정우성의 지니 TV 오리지널 '사랑한다고 말해줘'(극본 김민정, 연출 김윤진, 이하 '사말') 출연은 그가 원작 일본 드라마를 접했던 13년 전부터 예정돼 있었다. 드라마가 먼저 정우성의 마음을 울린 거다.
멜로 드라마를 하는 정우성의 모습은 2012년 '빠담빠담' 이후로 무려 11년 만이다. 그간 남성들의 대치, 암투를 위주로 연기했던 정우성의 필모에선 '사말'이 귀한 멜로 복귀작. 정우성은 오랜만에 드라마를 하며 TV 고화질에 맞춘 외모를 위해 5개월 동안 술을 끊기도 하며, 진우 역을 위해 수어를 직접 배우고 구사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손으로 말하는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는 배우 정모은의 소리없는 사랑을 다룬 클래식 멜로. 일본 TV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각본 키타카와 에리코, 제작 TBS 텔레비전)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그해 우리는' 김윤진 감독과 '구르미 그린 달빛' 김민정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정우성은 극 중 청각장애를 가진 화가 차진우 역을 맡았다. 진우는 그림만이 전부였던 세상에서 모은(신현빈 분)과 운명적으로 만난 후, 자신의 삶과 가치관이 변화됨을 느꼈다. 진우는 모은과 서로 이성적인 끌림을 느꼈음에도 자신 때문에 힘들어질지 모르는 모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별을 딛고 운명의 만남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재회엔딩을 그렸다.
-11년 만에 멜로 드라마를 선보인 소감은?
▶벌써 종영인가 싶다. 작년 10월 30일에 마지막 촬영이 끝났는데 영화 개봉도 하면서 정신없이 지났다. 단톡방에서 공유한 사진을 보니 '벌써 종영이네?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사실 일부러 외면한 건 아니었다. 하다보니 영화 일정이 계속 잡혀서 물리적 시간의 여력이 안 돼서 기회를 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장르가 갖고 있는 정서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촬영하면서 새삼스럽게 느꼈는데, 영화는 갖춰진 세계관을 통제하고 촬영하면 드라마는 일상 속의 모습을 담는 것이었다. 일상 속 인물을 연기하는 게 배우로서는 막연한 부러움이 있다. 촬영하면서 그런 걸 새삼스럽게 맛보면서 좋았다.
-사전제작 드라마는 처음 촬영인가.
▶'빠담빠담'도 거의 막방 일주일 전에 마지막 회를 촬영해서 사전제작을 한 거였다. '사말'은 사실 13년 전에 제가 만들고 싶었던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남자 주인공이 3화부터 목소리가 나오면 어떠냐고 해서 주제의식과 멀다고 생각했고, 아직은 이 소재의 드라마를 하기엔 환경적으로 못 미쳤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이런 장르에 관심을 가져줘서 제작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나이도 올라간 거다.(웃음) 정우성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허락한다는 절대적인 조건도 있었다. 그래서 조바심이 나긴 했다.
-'사말'의 원작 드라마 판권을 사면서 제작에 참여했다. 원작 판권을 산 과정은?
▶2011년에 판권을 샀다. 원작 드라마를 우연히 봤는데, 많은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사용하지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내레이션이 2화 엔딩에서 나오는데 가슴을 후려치더라. 그 느낌 때문에 하기로 마음 먹었다.
-진우 캐릭터의 표현이 어렵지는 않았나.
▶수어가 가장 어려웠다. 그것도 하나의 언어였는데, 내가 영어를 배운다고 해서 네이티브가 안 되지 않냐. 수어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전달하기 위해서 얼굴 표정들도 많이 쓰시던데, 얼굴 감정 표현을 얼마만큼 해야할지도 고민했다. 얼굴로 과하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수어 대사를 외울 때는 일반 대사를 외울 때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나.
▶많이 차이가 난다. 어순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진우보다 기현(허준석 분)이나 서경(김지현 분) 같은 캐릭터가 음성을 내면서 수어를 같이 하니 연기할 때 훨씬 힘들었을 거다. 두 배우는 현장에서도 정신이 없었다. 수어를 배운 과정은, 영상으로 수어 대사를 따로 받아서 봤고 초반엔 대면 수업을 하기도 했다. 사실 표정이란 게 되게 웃긴 게, 바라보는 사람으로 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차진우 표정 연기를 할 때는 진우의 내면 연기를 무채색으로 보이도록 하려고 했다. 바라보는 사람 각자의 감정으로 읽힐 수 있도록.
-멜로를 하기에 나이 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나.
▶사랑은 누구나 하지 않냐.(웃음) 원작은 30대 남성의 사랑 얘기인데 나이대를 제가 하니 올리게 됐다. 40대가 사랑하는 데에 대한 대처,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작업 때도 그걸 강조했다. 40대 차진우가 할 수 있는 사랑과 아픔에 대처하는 법을 보여주는데, 시청자들 그 누구도 정우성이기 때문에 30대로 봐주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선 제가 남성들과 부딪히고 스트레스가 있는 역할이었고 그게 얼굴에 표현되는 게 좋았는데, 요즘 TV 화질이 좋아져서 '얼굴에 피로감이 묻어있는데 뭐지?' 라고 생각했다.(웃음) 회식으로 술도 해왔지만, (드라마를 위해) 5개월 술을 끊기도 했다.
-40대의 사랑은 어떻게 바라봤나.
▶젊을 때의 사랑은 '내 사랑을 왜 몰라줘?'라고 한다면, 나이가 먹으면서 이성적인 생각도 개입시키는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상대에 대한 관점이 어느 정도 이성적이 되는지 생각하게 되고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지 않으려 한다.
-신현빈과는 어떻게 소통하며 연기했나.
▶현빈 배우도 아마 이렇게 많은 회의를 하며 연기한 적은 없었을 거다. 대본 나온 걸 감독과 함께 읽는데 6~8시간 정도 걸렸다. 모은이 소리를 다 채우지 않냐. 연기를 할 때 음성언어로 실리는 감정의 온도와 강도가 용이하지 않냐. 현빈 배우는 리액션으로 그걸 받아쳐야 해서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모은도 30대 중반으로 설정이 됐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사랑에 솔직해질 수 있는 저변은 무엇일까 고민했을 거다. 정말 최고의 정모은이었던 것 같다. 신현빈 배우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감성지수와 이성지수가 모든 사람에게 있는데, 신현빈 배우는 미묘하게 이성지수가 감정지수보다 높은 것 같았다. 산발적으로 저와 감독이 아이디어를 내면 신현빈 배우가 정리를 했다.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이었던 것 같고 착실한 동료였다. 영화에선 계속 동성배우와 치닥거림을 했는데, 남성배우들과는 산만한 느낌이었다.(웃음) 이번엔 산만한 느낌이 없는 뭔가의 안정적임이 있었다.
-'멜로'가 요즘 주류 장르는 아님에도 대중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자극적인 소재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순수한 멜로가 필요하다는 사명감은 아니다. 예전부터 그런 건 있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만 이용한 소재가 많지 않았냐. 천편일률적인 얘기가 많아서 '사랑은 팀장님의 전유물인가' 싶어서 '빠담빠담'도 선택했던 거다. 일상의 소중한 관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냐. 얼마 전에 신호등 앞에 섰는데 중년 커플이 손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삶을 지탱한다고 느껴서 욱했다. 그런 여러 모습이 삶에 존재하는 것 같다. '사말'을 선택했을 때는 인터넷이 발전했을 때 소리 없는 무책임한 소통과 말들이 많아졌던 때다. 사회에서도 배우를 수식하는 단어가 '최고'를 뛰어넘는 걸 지향하더라. 그 가치는 어디서 나오지 싶었고 소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고요함 속에서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13년 전에 원작을 접했고, 지금 작품을 연기한 느낌은 어땠나.
▶드라마에 대해 호응해 주시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계셔서 이 드라마가 세상에 나올 이유가 충분하다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했다. 이게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드라마이지 않냐.
-정우성이 '사말'의 판권을 산 후 13년 사이에 장애인에 대한 시선을 주제로 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받았다. '사말'의 메시지 전달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지.
▶'우영우'는 제가 다 보진 못했다. 제가 했던 작품 중에 영화 '증인'에서 지우(김향기 분)의 꿈이 변호사였다. 지우가 커서 우영우가 됐구나 싶었다.(웃음) 시청자나 관객이 좋아하는 코드를 규정짓고 시청자와 관객을 선입견에 가둬놓고 작품을 만들어서 대부분 망하지 않냐. 그러다가 '우영우'라는 게 나와서 '이런 것도 좋아해 주네'라고 하게 되는 것 같다. 바람직한 성공인 것 같다.
-진우는 모은에게 언제 마음이 동했을까.
▶이분법적으로 답을 요구하고 질문하는 시대인 것 같다. '최고로 좋아하는 작품은 뭐야?'라고도 묻는다. 그러나 살아가는 환경과 감수성이 다 다르지 않냐. 진우가 언제 모은에게 마음이 동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레이션에서 특히 신경 썼던 부분도 있었을까.
▶처음엔 목소리 잡는 게 어렵더라. 내 가슴을 크게 쳤던 그 내레이션을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불안하기도 했다. 점점 연기를 하면서 차진우의 내레이션에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후반에는 감기에 걸린 상태로 내레이션을 해서 목소리가 조금 두꺼워졌다.
-숏폼이 많아진 시대에 속도가 느린 드라마를 선보였다.
▶사유, 사고의 시간은 빨리 줄일 수는 없다. 세상을 바라보고 상대를 생각하고 모든 것들이, 서사는 천천히 이뤄진다. 삶을 숏폼처럼 빨리 줄이면 빨리 죽는다.(웃음) 다들 언제부터 빠르게 바뀌었는데, 빠른 것도 좋지만 뭐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좋은 것 같다. 누구든지 본인 스스로 사유의 시간을 여유롭게 천천히 가져야 할 것 같다.
-숏츠를 좀 보는 편인지.
▶잘 안 본다. 책을 많이 사는데 사는 만큼 읽지는 않는다.(웃음)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서울의 봄'으로 '천만 배우'가 된 소감은?
▶어제 감사 무대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오래간만에 무대인사에 합류하지 않은 배우를 떠올렸다. 천만은 정말 관객들이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시대 정서가 있지 않냐. 결핍된 정서를 채워주는 뭔가가 있을 때 찾는 것 같은데, '서울의 봄'에서 그런 것들을 찾으신 느낌이었다. '역시 나는 할 줄 알았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천만이 되는 과정에서 너무 재미있었다. 저는 어떤 영화를 통해서도 단 한번도 천만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하게 될지 생각할 수도 없다.
-'서울의 봄' 관련 무대인사도 230회가 넘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배우는 관객이 만나는 걸 허락하는 한 계속 만날 수 있는 거다.
-배우로서도, 연출자로서도 성공적인 행보다. 배우와 연출자 중에 선택을 해본다면?
▶선택할 수 없다. 연출자가 적성엔 맞는 것 같다. '보호자'는 사실 타깃이 아니었고 영화 관계자로 잔소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영화들이 준비할 때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영상을 짜깁기하고 그렇게 찍으려고 하는데 그게 바람직한가 생각했다. 클리셰가 많은 부분을 내가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촬영했다.
-점차 의미가 있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느낌이다. 앞으로 어떤 소재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가.
▶그건 내 개인적인 사심이고 의미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전도 대사'가 되는 건 아니지 않냐. 내 모든 일에 의미를 가지면 '의미의 포로'가 되지 않을까. 다수의 공감을 얻었을 때 나중에 그 의미를 평가받는 것 같다. '서울의 봄'도 잘 됐으니까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 같다. 딱히 어떤 소재를 보여주고 싶다는 건 없다.
-이전엔 멜로를 잘 안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영화를 계속해서 하게 됐다. 내 앞에 다가오는 시나리오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드라마는 영화 스케줄과 겹쳐서 못했던 거다.
-차후 멜로 장르를 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멜로 또 할 수 있을까 싶다.(웃음)
-데뷔 30년 차다. 현재 한국 배우들이 해외에서 영향력이 커진 걸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한국 영화에 대해 해외에서 인정하게 된 것들이 앞으로 잘 지켜지기 위해선 한국에서 영화업을 하는 사람들이 바람직한 고민을 하고 있나 생각해 봐야겠다.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서 안정된 장르만 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쉴 때는 어떤 걸 하는 편인가.
▶저는 쉰 적이 없다. '서울의 봄' 개봉하고 오늘 드라마 종방하면 조금 여유를 갖고 다시 드라마를 봐야겠다. 사실 코로나 전부터 쉬는 시간 없이 결정, 회의를 계속했고 '보호자' 촬영하고 후반작업 하면서 '고요의 바다'를 바로 제작해서 현장에 있다가 중간에 드라마 대역배우도 하고 '헌트' 촬영하고 또 중간에 '고요의 바다' 후반 작업을 했다. 계속 이어달리기를 하다 보니 '사말' 끝나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024년 신년의 목표는?
▶잠깐 시간을 가져야겠단 생각이다.
-배우로서 원동력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어느 시점에선 이 생각이 흐리멍텅해졌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좋은 일이 생겨도 당연히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늘 감사하려고 한다.
-팬들 연령대가 다양하다. 팬들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제가 팬미팅을 잘 안 했는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한 거다. 어떤 땐 무덤덤한 평가를 원한 거다. 내가 '스타 정우성이야'라는 자세로 소통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요즘 팬들 사이에 '결혼해줘'란 게 유행이냐. 젊은 친구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웃음)
-진우와 모은은 어떤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나.
▶이성적인 사랑보다는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차진우는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차진우는 서경과의 100% 감성적인 사랑에 대한 아픔도 겪어봤다. 지나간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진우가 서경과 감정 정리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하려고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정말 모르겠다. 규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나이대마다 느끼는 사랑이 다르지 않냐. 그리고 늘 서툴지 않냐. 지금도 서툰데 그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겠다.
한해선 기자 hhs422@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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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배우 정우성의 음성을 내레이션으로만 들을 수 있는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작품이 나왔다. 청각장애인 역할을 한 정우성이 생경하지만 그가 준 저릿한 정통 멜로의 울림은 컸다. 정우성의 지니 TV 오리지널 '사랑한다고 말해줘'(극본 김민정, 연출 김윤진, 이하 '사말') 출연은 그가 원작 일본 드라마를 접했던 13년 전부터 예정돼 있었다. 드라마가 먼저 정우성의 마음을 울린 거다.
멜로 드라마를 하는 정우성의 모습은 2012년 '빠담빠담' 이후로 무려 11년 만이다. 그간 남성들의 대치, 암투를 위주로 연기했던 정우성의 필모에선 '사말'이 귀한 멜로 복귀작. 정우성은 오랜만에 드라마를 하며 TV 고화질에 맞춘 외모를 위해 5개월 동안 술을 끊기도 하며, 진우 역을 위해 수어를 직접 배우고 구사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손으로 말하는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는 배우 정모은의 소리없는 사랑을 다룬 클래식 멜로. 일본 TV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각본 키타카와 에리코, 제작 TBS 텔레비전)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그해 우리는' 김윤진 감독과 '구르미 그린 달빛' 김민정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정우성은 극 중 청각장애를 가진 화가 차진우 역을 맡았다. 진우는 그림만이 전부였던 세상에서 모은(신현빈 분)과 운명적으로 만난 후, 자신의 삶과 가치관이 변화됨을 느꼈다. 진우는 모은과 서로 이성적인 끌림을 느꼈음에도 자신 때문에 힘들어질지 모르는 모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별을 딛고 운명의 만남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재회엔딩을 그렸다.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11년 만에 멜로 드라마를 선보인 소감은?
▶벌써 종영인가 싶다. 작년 10월 30일에 마지막 촬영이 끝났는데 영화 개봉도 하면서 정신없이 지났다. 단톡방에서 공유한 사진을 보니 '벌써 종영이네?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사실 일부러 외면한 건 아니었다. 하다보니 영화 일정이 계속 잡혀서 물리적 시간의 여력이 안 돼서 기회를 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장르가 갖고 있는 정서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촬영하면서 새삼스럽게 느꼈는데, 영화는 갖춰진 세계관을 통제하고 촬영하면 드라마는 일상 속의 모습을 담는 것이었다. 일상 속 인물을 연기하는 게 배우로서는 막연한 부러움이 있다. 촬영하면서 그런 걸 새삼스럽게 맛보면서 좋았다.
-사전제작 드라마는 처음 촬영인가.
▶'빠담빠담'도 거의 막방 일주일 전에 마지막 회를 촬영해서 사전제작을 한 거였다. '사말'은 사실 13년 전에 제가 만들고 싶었던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남자 주인공이 3화부터 목소리가 나오면 어떠냐고 해서 주제의식과 멀다고 생각했고, 아직은 이 소재의 드라마를 하기엔 환경적으로 못 미쳤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이런 장르에 관심을 가져줘서 제작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나이도 올라간 거다.(웃음) 정우성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허락한다는 절대적인 조건도 있었다. 그래서 조바심이 나긴 했다.
-'사말'의 원작 드라마 판권을 사면서 제작에 참여했다. 원작 판권을 산 과정은?
▶2011년에 판권을 샀다. 원작 드라마를 우연히 봤는데, 많은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사용하지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내레이션이 2화 엔딩에서 나오는데 가슴을 후려치더라. 그 느낌 때문에 하기로 마음 먹었다.
-진우 캐릭터의 표현이 어렵지는 않았나.
▶수어가 가장 어려웠다. 그것도 하나의 언어였는데, 내가 영어를 배운다고 해서 네이티브가 안 되지 않냐. 수어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전달하기 위해서 얼굴 표정들도 많이 쓰시던데, 얼굴 감정 표현을 얼마만큼 해야할지도 고민했다. 얼굴로 과하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수어 대사를 외울 때는 일반 대사를 외울 때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나.
▶많이 차이가 난다. 어순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진우보다 기현(허준석 분)이나 서경(김지현 분) 같은 캐릭터가 음성을 내면서 수어를 같이 하니 연기할 때 훨씬 힘들었을 거다. 두 배우는 현장에서도 정신이 없었다. 수어를 배운 과정은, 영상으로 수어 대사를 따로 받아서 봤고 초반엔 대면 수업을 하기도 했다. 사실 표정이란 게 되게 웃긴 게, 바라보는 사람으로 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차진우 표정 연기를 할 때는 진우의 내면 연기를 무채색으로 보이도록 하려고 했다. 바라보는 사람 각자의 감정으로 읽힐 수 있도록.
-멜로를 하기에 나이 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나.
▶사랑은 누구나 하지 않냐.(웃음) 원작은 30대 남성의 사랑 얘기인데 나이대를 제가 하니 올리게 됐다. 40대가 사랑하는 데에 대한 대처,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작업 때도 그걸 강조했다. 40대 차진우가 할 수 있는 사랑과 아픔에 대처하는 법을 보여주는데, 시청자들 그 누구도 정우성이기 때문에 30대로 봐주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선 제가 남성들과 부딪히고 스트레스가 있는 역할이었고 그게 얼굴에 표현되는 게 좋았는데, 요즘 TV 화질이 좋아져서 '얼굴에 피로감이 묻어있는데 뭐지?' 라고 생각했다.(웃음) 회식으로 술도 해왔지만, (드라마를 위해) 5개월 술을 끊기도 했다.
-40대의 사랑은 어떻게 바라봤나.
▶젊을 때의 사랑은 '내 사랑을 왜 몰라줘?'라고 한다면, 나이가 먹으면서 이성적인 생각도 개입시키는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상대에 대한 관점이 어느 정도 이성적이 되는지 생각하게 되고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지 않으려 한다.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신현빈과는 어떻게 소통하며 연기했나.
▶현빈 배우도 아마 이렇게 많은 회의를 하며 연기한 적은 없었을 거다. 대본 나온 걸 감독과 함께 읽는데 6~8시간 정도 걸렸다. 모은이 소리를 다 채우지 않냐. 연기를 할 때 음성언어로 실리는 감정의 온도와 강도가 용이하지 않냐. 현빈 배우는 리액션으로 그걸 받아쳐야 해서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모은도 30대 중반으로 설정이 됐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사랑에 솔직해질 수 있는 저변은 무엇일까 고민했을 거다. 정말 최고의 정모은이었던 것 같다. 신현빈 배우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감성지수와 이성지수가 모든 사람에게 있는데, 신현빈 배우는 미묘하게 이성지수가 감정지수보다 높은 것 같았다. 산발적으로 저와 감독이 아이디어를 내면 신현빈 배우가 정리를 했다.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이었던 것 같고 착실한 동료였다. 영화에선 계속 동성배우와 치닥거림을 했는데, 남성배우들과는 산만한 느낌이었다.(웃음) 이번엔 산만한 느낌이 없는 뭔가의 안정적임이 있었다.
-'멜로'가 요즘 주류 장르는 아님에도 대중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자극적인 소재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순수한 멜로가 필요하다는 사명감은 아니다. 예전부터 그런 건 있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만 이용한 소재가 많지 않았냐. 천편일률적인 얘기가 많아서 '사랑은 팀장님의 전유물인가' 싶어서 '빠담빠담'도 선택했던 거다. 일상의 소중한 관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냐. 얼마 전에 신호등 앞에 섰는데 중년 커플이 손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삶을 지탱한다고 느껴서 욱했다. 그런 여러 모습이 삶에 존재하는 것 같다. '사말'을 선택했을 때는 인터넷이 발전했을 때 소리 없는 무책임한 소통과 말들이 많아졌던 때다. 사회에서도 배우를 수식하는 단어가 '최고'를 뛰어넘는 걸 지향하더라. 그 가치는 어디서 나오지 싶었고 소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고요함 속에서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13년 전에 원작을 접했고, 지금 작품을 연기한 느낌은 어땠나.
▶드라마에 대해 호응해 주시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계셔서 이 드라마가 세상에 나올 이유가 충분하다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했다. 이게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드라마이지 않냐.
-정우성이 '사말'의 판권을 산 후 13년 사이에 장애인에 대한 시선을 주제로 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받았다. '사말'의 메시지 전달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지.
▶'우영우'는 제가 다 보진 못했다. 제가 했던 작품 중에 영화 '증인'에서 지우(김향기 분)의 꿈이 변호사였다. 지우가 커서 우영우가 됐구나 싶었다.(웃음) 시청자나 관객이 좋아하는 코드를 규정짓고 시청자와 관객을 선입견에 가둬놓고 작품을 만들어서 대부분 망하지 않냐. 그러다가 '우영우'라는 게 나와서 '이런 것도 좋아해 주네'라고 하게 되는 것 같다. 바람직한 성공인 것 같다.
-진우는 모은에게 언제 마음이 동했을까.
▶이분법적으로 답을 요구하고 질문하는 시대인 것 같다. '최고로 좋아하는 작품은 뭐야?'라고도 묻는다. 그러나 살아가는 환경과 감수성이 다 다르지 않냐. 진우가 언제 모은에게 마음이 동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레이션에서 특히 신경 썼던 부분도 있었을까.
▶처음엔 목소리 잡는 게 어렵더라. 내 가슴을 크게 쳤던 그 내레이션을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불안하기도 했다. 점점 연기를 하면서 차진우의 내레이션에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후반에는 감기에 걸린 상태로 내레이션을 해서 목소리가 조금 두꺼워졌다.
-숏폼이 많아진 시대에 속도가 느린 드라마를 선보였다.
▶사유, 사고의 시간은 빨리 줄일 수는 없다. 세상을 바라보고 상대를 생각하고 모든 것들이, 서사는 천천히 이뤄진다. 삶을 숏폼처럼 빨리 줄이면 빨리 죽는다.(웃음) 다들 언제부터 빠르게 바뀌었는데, 빠른 것도 좋지만 뭐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좋은 것 같다. 누구든지 본인 스스로 사유의 시간을 여유롭게 천천히 가져야 할 것 같다.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숏츠를 좀 보는 편인지.
▶잘 안 본다. 책을 많이 사는데 사는 만큼 읽지는 않는다.(웃음)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서울의 봄'으로 '천만 배우'가 된 소감은?
▶어제 감사 무대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오래간만에 무대인사에 합류하지 않은 배우를 떠올렸다. 천만은 정말 관객들이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시대 정서가 있지 않냐. 결핍된 정서를 채워주는 뭔가가 있을 때 찾는 것 같은데, '서울의 봄'에서 그런 것들을 찾으신 느낌이었다. '역시 나는 할 줄 알았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천만이 되는 과정에서 너무 재미있었다. 저는 어떤 영화를 통해서도 단 한번도 천만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하게 될지 생각할 수도 없다.
-'서울의 봄' 관련 무대인사도 230회가 넘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배우는 관객이 만나는 걸 허락하는 한 계속 만날 수 있는 거다.
-배우로서도, 연출자로서도 성공적인 행보다. 배우와 연출자 중에 선택을 해본다면?
▶선택할 수 없다. 연출자가 적성엔 맞는 것 같다. '보호자'는 사실 타깃이 아니었고 영화 관계자로 잔소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영화들이 준비할 때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영상을 짜깁기하고 그렇게 찍으려고 하는데 그게 바람직한가 생각했다. 클리셰가 많은 부분을 내가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촬영했다.
-점차 의미가 있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느낌이다. 앞으로 어떤 소재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가.
▶그건 내 개인적인 사심이고 의미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전도 대사'가 되는 건 아니지 않냐. 내 모든 일에 의미를 가지면 '의미의 포로'가 되지 않을까. 다수의 공감을 얻었을 때 나중에 그 의미를 평가받는 것 같다. '서울의 봄'도 잘 됐으니까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 같다. 딱히 어떤 소재를 보여주고 싶다는 건 없다.
-이전엔 멜로를 잘 안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영화를 계속해서 하게 됐다. 내 앞에 다가오는 시나리오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드라마는 영화 스케줄과 겹쳐서 못했던 거다.
-차후 멜로 장르를 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멜로 또 할 수 있을까 싶다.(웃음)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사진=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
-데뷔 30년 차다. 현재 한국 배우들이 해외에서 영향력이 커진 걸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한국 영화에 대해 해외에서 인정하게 된 것들이 앞으로 잘 지켜지기 위해선 한국에서 영화업을 하는 사람들이 바람직한 고민을 하고 있나 생각해 봐야겠다.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서 안정된 장르만 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쉴 때는 어떤 걸 하는 편인가.
▶저는 쉰 적이 없다. '서울의 봄' 개봉하고 오늘 드라마 종방하면 조금 여유를 갖고 다시 드라마를 봐야겠다. 사실 코로나 전부터 쉬는 시간 없이 결정, 회의를 계속했고 '보호자' 촬영하고 후반작업 하면서 '고요의 바다'를 바로 제작해서 현장에 있다가 중간에 드라마 대역배우도 하고 '헌트' 촬영하고 또 중간에 '고요의 바다' 후반 작업을 했다. 계속 이어달리기를 하다 보니 '사말' 끝나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024년 신년의 목표는?
▶잠깐 시간을 가져야겠단 생각이다.
-배우로서 원동력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어느 시점에선 이 생각이 흐리멍텅해졌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좋은 일이 생겨도 당연히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늘 감사하려고 한다.
-팬들 연령대가 다양하다. 팬들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제가 팬미팅을 잘 안 했는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한 거다. 어떤 땐 무덤덤한 평가를 원한 거다. 내가 '스타 정우성이야'라는 자세로 소통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요즘 팬들 사이에 '결혼해줘'란 게 유행이냐. 젊은 친구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웃음)
-진우와 모은은 어떤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나.
▶이성적인 사랑보다는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차진우는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차진우는 서경과의 100% 감성적인 사랑에 대한 아픔도 겪어봤다. 지나간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진우가 서경과 감정 정리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하려고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정말 모르겠다. 규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나이대마다 느끼는 사랑이 다르지 않냐. 그리고 늘 서툴지 않냐. 지금도 서툰데 그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겠다.
한해선 기자 hhs422@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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