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의 축구話] 어리석은 수아레스, 어수룩한 리버풀
입력 : 2012.01.06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인종차별 한 적은 없지만 징계는 받겠다.”

“절차는 위법이지만 법률은 유효하다”라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신공을 따라 할 줄이야. 수아레스 사건으로 발칵 뒤집혀 정신 못 차리고 망신만 당한 리버풀FC의 이야기다.

리버풀의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는 지난해 10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중 파트리스 에브라에게 인종차별 폭언을 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진상조사에 들어갔고, 수아레스와 리버풀 측은 부당한 대우를 비난했다. 심지어 수아레스가 그려진 티셔츠를 선수단 전원이 착용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수아레스에 대해서 8경기 출전정지와 4만 파운드의 벌금 징계를 내리자 다시 한번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조사 과정을 상세히 적은 11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일반에 공개하자 리버풀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권력에 당당히(?) 맞서던 수아레스도 슬그머니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먼저 ‘인종차별’이란 단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단순히 피부색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수 집단에 대한 각종 차별 행위를 포괄한다. ‘인종’이 아니라 ‘차별’에 방점이 찍힌다. 수아레스가 에브라에게 “나는 검둥이랑 말 안 해”라고 말한 것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인에게 “이런 망할 놈의 집시 자식!”이라고 욕하는 것도 ‘레이시즘(Racism)’, 즉 인종차별이다. 영국에서 인종차별은 대표적인 금기(禁忌)다. 워낙 민감해서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BBC ‘매치 오브 더 데이’의 고정 패널 알란 한센은 수아레스 사건을 거론하는 과정에 ‘유색인종(Coloured)’라는 표현을 썼다가 시청자의 거센 비난을 받곤 즉시 공개 사과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첨부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피부색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회사가 증명사진 첨부를 요구했다간 당장 인종차별 기업으로 낙인 찍힌다. 그런 곳에서 수아레스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수아레스가 억울함을 호소한 이유는 그가 사용한 ‘Negro(검둥이)’라는 표현의 보편성과 조사 과정의 부당함이다. 수아레스는 자신의 나라(우루과이)에선 이 표현이 일반적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흑인’이란 단어처럼 폭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식 사과문에서도 수아레스는 “검둥이란 단어를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잉글랜드축구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수아레스는 이 표현을 일곱 번 사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수아레스의 주장대로 ‘Negro’가 우루과이나 남미에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한들 그가 있는 곳이 영국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로마에선 로마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수아레스는 공식 사과문에서 “다시는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억울하다고 주장할 땐 언제고.

조사 과정에서 당한 일방적 처사에 대해선 사실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종차별 관련 법규정은 어디까지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당연히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수아레스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고 에브라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해도 잉글랜드축구협회는 후자의 손을 들어줄 확률이 매우 높다. 수아레스와 리버풀이 펼친 티셔츠 착용 퍼포먼스도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억울함의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리버풀은 처음부터 수아레스의 편에 서서 적극 변호했다. 자기 구단 선수이니 지켜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리버풀이 이토록 강경하게 나왔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팬심(心) 이탈이다. 리버풀은 전세계적으로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특급 브랜드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 지역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지금 당장 구단 매출로 이어지지 않지만 프로스포츠 시장에서 팬 관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세계에 퍼져있는 수많은 팬들 중에는 수아레스가 말한 ‘검둥이’들도 많고 한센이 표현한 ‘유색인’도 많다. 리버풀을 지지하는 한국 팬들도 그 항목에 속한다. 리버풀로서는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비상사태란 뜻이다.

어느 기업이나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 리버풀에는 그런 세심함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수아레스 지지 티셔츠 퍼포먼스라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고야 말았다. 흑인을 ‘검둥이’라고 부른 동료를 지지하는 티셔츠를 입은 ‘흑인’ 수비수 글렌 존슨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KKK단이나 아파르트헤이트를 위해 일하는 흑인 스파이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물론 존슨이 편한 마음으로 그 티셔츠를 입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존슨은 그날 이후 수많은 흑인 축구 선배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리버풀의 수아레스 티셔츠 착용 퍼포먼스가 낳은 유일한 긍정적 효과라곤 다른 클럽들로 하여금 “아, 저런 짓을 하면 절대로 안 되겠구나”라는 교훈을 줬다는 것뿐이었다.



리버풀의 초강경 대응은 결국 잉글랜드축구협회를 자극한 끝에 상세 보고서의 공개라는, 리버풀로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티셔츠 코미디로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리버풀의 자존심은 이 보고서가 공개되는 순간 완전히 구정물에 빠져버렸다. 수아레스의 잘못을 명명백백히 기술한 보고서 앞에서 리버풀과 수아레스는 전의를 상실한 채 곧바로 백기투항 해야 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악수(惡手)였다. 리버풀은 “인종차별을 한 적은 없지만 징계를 수용한다”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갈무리했다. 수아레스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면서도 끝끝내 에브라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자신의 단어 사용에 대해서만 수아레스는 팬들의 용서를 구했다. 둘 다 ‘쿨’하지 못한 최악의 패배자(Worst loser)였다.

한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 인식이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 크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을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중국 제품을 소재로 한 코미디 소재라든가, 일본인을 원숭이에 빗대는 농담은 우리 주위에서 너무 흔하다. 동남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받는 사회적 핍박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한국 축구판에서만큼은 그런 슬프고 끔찍한 문제가 없었으면 한다.

수아레스-에브라 언쟁 내용
에브라: 나를 왜 찼지?
수아레스: 너가 검둥이니까.
에브라: 다시 한번 말해봐. 한방 날려줄 테니.
수아레스: 나는 검둥이랑 말을 안 하지.
에브라: 너 정말 나한테 맞아야겠다.
수아레스: 때려봐. 검둥이, 검둥이, 검둥이.
*수아레스가 에브라의 왼팔을 살짝 꼬집음(검은 피부를 자극하는 제스처).
*디르크 카윗이 두 선수를 말리고 주심이 두 선수를 호출함.

*조사 과정에서 수아레스는 이 모든 대화 내용을 부인했음. 에브라가 먼저 “남미 녀석”이라고 말했고, 그에 대해서 “왜 그래, 검둥이”라고 대답했다고 주장함. 우루과이에서는 흑인뿐만 아니라 피부가 약간 검은 사람 또는 검은색 머리털을 가진 친구를 ‘검둥이(Negro)’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한 표현이라고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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