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통신] 흰 독수리와 붉은 곰이 싸우던 날
입력 : 2012.06.13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기사 첨부이미지
[스포탈코리아=바르샤바(폴란드)] 홍재민 기자= 운명의 날이 밝았다. 불편한 역사를 공유한 폴란드와 러시아가 그라운드 전쟁을 벌인다.

12일 바르샤바 시내에서 평소 친분이 있는 영국인 기자와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12시45분에 만났지만 그는 “식사 끝나고 바로 경기장 미디어센터로 가자. 오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폴란드-러시아 경기 킥오프는 현지시각 저녁 8시45분이다. 대략 여섯 시간 전에 현장에 도착하는 셈이다. 하지만 흔쾌히 그를 따랐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축구 맞대결은 유럽판 ‘한일전’이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는 1947년부터 1990년 레흐 바웬사의 대통령 당선 전까지 구(舊)소련(USSR)의 사실상 속국 신세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응한 바르샤바조약기구도 이곳에 세워졌다. 이런 굴욕에서 벗어난 지가 겨우 22년밖에 되지 않았다. 해방 22년째인 한국이 일본과 축구 맞대결을 펼치는 셈이다. 패배란 있을 수 없다. 폴란드를 업신여기는 러시아의 사회적 풍토까지 겹쳐 두 나라의 축구 경기 분위기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설상가상 이날은 러시아의 국경일(러시아의 날, 6월12일)이다. 티켓도 없는 러시아 팬들마저 무작정 바르샤바를 찾는 이상 사태가 벌어졌다. 첫 경기에서 체코를 4-1로 대파했으니 팬들의 기대도 높아졌다.

당연히 유럽축구연맹(UEFA)과 폴란드 경찰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전일 만난 바르샤바 경찰은 “내일 6천6백 명이 동원된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그들로선 적대관계의 국가간 축구 맞대결이 전혀 반갑지 않다. 11~12일 양일간 바르샤바 시장과 폴란드축구협회장이 연이어 기자회견을 가졌다. 과열 양상을 보이는 양국 팬들을 자제시키기 위함이었다. 양팀 팬들간 접촉이 불가피하니 동원 가능한 전투경찰을 팬존과 경기장 주변에 모두 투입시켰다.



오후 3시에 경기장에 도착했다. 역시나 시위진압용 차량과 전투경찰이 곳곳에 서있었다. 러시아 휴일임을 입증하듯이 많은 러시아 팬들이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서 암표를 구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얼큰하게 취해있는 팬들도 많았다. 팬 취재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미디어센터로 자리를 폈다. 첫 경기 때와 달리 미디어센터로 향하는 외곽도로가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있었다. 취재진은 무사 통과했지만 일반인은 출입이 통제되었다. 차도도 막았다. 글래디에이터를 연상시키는 전투경찰들이 양팀 팬 동선이 겹치는 요소마다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아쉽게도 킥오프 전 불상사가 일어났다. 경기장 주변에서 양팀 팬들이 패싸움을 벌인 것이다. 엄청난 경찰 병력이 동원된 덕분에 다행히 별다른 부상자 없이 조기 진압될 수 있었다.

그나마 경기장 안에서는 특별한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 유일한 문제는 러시아가 너무 강하다는 점이었다. 홈 어드밴티지를 가진 폴란드라고 해도 이번 대회 러시아의 경기력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유로2008 준비를 통해 뛰어난 능력의 선수들이 발굴되었다. 이후 4년간 그들은 경험이란 강력한 무기까지 체득했다. 러시아는 더 이상 축구 변방이나 다크호스가 아니었다. 젊은 선수들 중심인 폴란드에 없는 부분을 러시아는 이미 갖고 있었다. 경기에서도 그 사실이 입증되었다. 러시아 선수들은 뛰어난 압박과 부드러운 패스 연결을 선보이며 폴란드를 압도했다.

전반 37분 알란 자고에프의 선제골 장면에서도 양팀간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다. 지르코프의 저돌적인 공격 가담으로 러시아가 왼쪽 측면 프리킥을 얻었다. 안드레이 아르샤빈이 프리킥을 차기 직전 페널티박스 안에서는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아르샤빈이 크로스를 올리기 전부터 폴란드의 수비 라인은 이미 무너져있었다. 걱정은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문전 쇄도하는 자고에프의 정수리 부분을 스치며 방향이 살짝 바뀐 볼이 그대로 폴란드 골문으로 들어가버렸다. 선제 실점을 허용해버린 것이다.



후반 들어서도 폴란드는 암울해 보였다. 이상하리만치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공격에 나설 의지가 없어 보였다. 당연히 러시아의 볼 점유율이 더 높아졌다. 경기장 내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다행히 폴란드는 후반 12분 주장 야쿱 ‘쿠바’ 브와슈치코프스키가 환상적인 왼발슛을 성공시켜 동점으로 따라붙는 데 성공했다. 이 골이 그 시간대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경험이 부족한 폴란드는 자기 안방에서 ‘숙적’ 러시아에 대패 당하는 치욕을 맛봤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 폴란드는 러시아의 맹공에 잘 버텼다. 승점 1점이란 수확은 확실히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강호 러시아를 상대한 경기였던 탓에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하는 선택도 현실적이었다. 경기 종료가 다가오자 러시아의 원정 응원단 앞쪽으로 전투경찰의 인간벽이 세워졌다. 양쪽 서포터스간 충돌을 막는 것은 물론 그 전 단계에서 몰상식한 일부 팬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폴란드의 국가 상징은 흰 독수리다. 꿈 많은 흰 독수리는 폴란드 경제는 물론 유로2012를 통한 스포츠 인프라 발전을 위해 고된 날개 짓을 반복 중이다. 반면 러시아 축구는 이미 불쑥 성장했다. 막강 자금력을 바탕으로 일취월장했다. 국가 제창시 러시아 응원석 쪽에 등장했던 거대한 통천은 이러한 러시아의 힘을 대변해줬다. 통천의 크기와 색깔 모두 ‘붉은 곰’ 러시아를 나타내기 안성맞춤이었다. 실력을 떠나 자존심과 정신력이 정면충돌했던 이날의 라이벌전의 결과가 무승부로 끝났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스럽다.

오늘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