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통신] 마지막 ‘폴스카’는 체코 팬들이 외쳤다
입력 : 2012.06.1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브로츠와프(폴란드)] 홍재민 기자= 유종의 미. 승자를 위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끝맺음은 과정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폴란드는 초행인지라 헷갈리는 게 여러 가지다. 특히 폴란드어의 발음이 곤욕이다. 체코와 폴란드의 유로2012 A조 3경기가 벌어진 도시 이름이 대표적이다. 알파벳 ‘Wroclaw’라고 쓴다. 워로클로? 우로클라우? 무식이 탄로났다. 정확한 발음은 ‘브로츠와프’였다. 발음이 입에 붙지 않아 기차표를 사면서 몇 차례나 행선지명을 재확인했다. “이거 브, 로, 츠, 와, 프 가는 티켓 맞죠?”라고.

기온이 뚝 떨어진 바르샤바 날씨에 맞춰 긴팔 옷을 세 개나 껴입고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다섯 시간 만에 도착한 브로츠와프는 ‘완전무결’ 여름 날씨였다. 입고 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배낭 속에 쑤셔 넣었다. 가뜩이나 무거웠던 배낭이 두 어깨를 힘껏 짓눌렀다. 그단스크처럼 브로츠와프 시내도 축구 열기로 후끈거렸다. 개최국 폴란드가 8강에 오르려면 이날 체코를 반드시 꺾어야 한다. 여기저기서 “폴스카 비아우 체르보니(폴란드, 하양, 빨강)” 구호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폴란드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시내에서 전용 기차로 10분 거리에 환상적인 브로츠와프 시립경기장이 당당히 서있었다. 하지만 경기장 안은 웅장해 보이는 외모와는 전혀 달랐다. 관중석 4개 면이 통으로 이루어져있어 일체감이 돋보였다. 이런 경기장 설계를 선호하는 취향 덕분에 괜스레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푸른 잔디 위에서는 양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일찌감치 관중석에 자리잡은 폴란드 관중이 열심히 응원 구호를 외쳤다. 표정 하나하나에 희망과 간절함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전반전은 폴란드의 일방적 공세로 진행되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폴란드 선수들은 성난 황소처럼 체코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전반 2분 왼쪽 프리킥 크로스가 문전에서 수비에 맞고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문전에 있던 수비수 세바스티안 보에니슈의 역동적인 오버헤드킥은 옆그물을 때리고 말았다. 이 장면에서 폴란드 선수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승리에 너무나 목말라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열의도 보였다.

체코는 느긋했다. 아니, 노련했다. 8강 진출을 꿈꾸는 개최국을 상대하는 경기라면 초반 전개는 뻔하다. 상대는 투지 넘치게 몰려온다. 동기부여가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다. 이런 팀이라면 공격수 개인보다는 공간을 막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체코는 수많은 프리킥을 허용했다. 하지만 문전으로 날아드는 크로스를 차례차례 되돌려 보냈다. 볼을 잡으면 시간을 끌었다. 체코는 볼이 아니라 시간을 점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코의 시간 지연은 상대의 초조함을 증폭시켰다. 경험이 돋보이는 운영이었다.

체코 선수 11인의 노련미에 폴란드 전체가 말렸다. 폴란드 선발 11인은 물론 코칭 스태프와 경기장 가득 메운 관중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폴란드 국민 모두가 더더욱 다급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폴스카 비아우 체르보니”의 데시벨이 높아져갔다.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유로 8강 고지까지 단 한 골이 필요했다.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폴란드 선수들은 미숙했다. 어렸다. 후반 들어 체코가 밀고 나오자 수비하기 급급했다. 공격적으로 나오는 상대는 뒤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아쉽게도 폴란드의 젊은 선수들은 그런 틈새를 노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곧 실점 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폴란드를 가둬 버렸다. 후반 27분 폴란드는 어설프고 다급하게 시도한 패스가 끊기고 말았다. 체코 선수들이 일시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페트르 이라첵이 ‘확실하게’ 선제골을 터트렸다. 체코의 역습은 마치 불쌍한 토끼가 도망갈 길목까지 이미 간파하고 있는 늑대떼의 사냥 같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간단히 해치웠다.

폴란드는 좌절했다. 경기 내내 쏟아졌던 굵은 빗줄기처럼 이날의 1-0 패배는 폴란드 국민의 희망을 슬픔으로 적셨다. 관중석을 가득 채웠던 관중은 후반 추가시간 때까지 골을 강렬히 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실패 가능성을 실감하지 못했다. 기적은 없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길게 울렸다. 폴란드 팬들은 순간적으로 침묵에 빠졌고, 오직 체코 팬들이 내지르는 환성만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이들은 8일 전 바로 이곳에서 4-1 참패를 목격했다. 열흘도 되기 전에 비루한 패자에서 빛나는 승자로 환골탈태했다.

체코 선수들과 팬들은 마주보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빗물을 흠뻑 먹은 잔디 위로 체코 선수들이 다이빙 세리머니를 펼치면서 분위기를 돋궜다. 그 모습을 폴란드 관중은 멍하니 쳐다봐야만 했다. 그러나 조금 뒤 폴란드 연호가 터져 나왔다. “폴스카! 폴스카! 폴스카!” 폴란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체코 원정 서포터스의 외침이었다. 승리를 만끽한 뒤 체코 팬들은 안방 주인의 슬픔을 위로했다. 기대하지 못했던 손님의 호의에 폴란드 팬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폴란드는 자국에서 열린 축구의 향연에서 세 경기만에 퇴장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고, 국민 모두 뜨겁게 응원했다. 열정에 어울리는 보상을 받진 못했다. 마지막 상대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 모두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격려를 보냈다. 폴란드는 유종의 미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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