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돋보기] 영국식 ‘몸 축구’ 한계 알려준 이탈리아
입력 : 2012.06.25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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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홍재민 기자= “축구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패배 확정 순간을 묘사한 영국 TV중계진의 외마디였다. 자국 방송사의 코멘트가 저 정도였으니 경기 내용이 충분히 짐작 간다.

한국시간 25일 새벽 열린 유로2012 8강전에서 잉글랜드는 이탈리아에 승부차기 끝에 4-2로 패했다. 슈팅수 35-9, 유효 슈팅수 20-4로 압도 당하면서도 연장전까지 0-0으로 버텼다. 하지만 결국 승부차기에서 또 패하고 말았다. 4강행 티켓은 내용에서 앞선 이탈리아의 몫이었다.

두 팀의 경기 운영 방식은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잉글랜드는 고집을 피웠고 이탈리아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잉글랜드는 이날도 역시 4-4-2 전술이었다. 고정된 선발 라인업이었다. 대니 웰벡을 원톱으로 세웠고, 그 뒤에 웨인 루니가 고리 역할을 했다. 스티븐 제라드와 스콧 파커가 다리가 부서져라 뛰어다니며 저항했다. 공격 방법은 두 가지였다. 루니가 볼을 지켜낸 뒤 좌우 측면으로 벌리거나 애슐리 영의 빠른 측면 돌파였다.

잉글랜드는 솔직하고 직선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할 줄 아는 두 가지 방법만 고집했다. 강팀을 상대하는 약팀으로선 당연한 작전이다. 볼을 빼앗으면 롱패스를 통해 빠른 역습을 시도했다. 그런 장면이 자주 연출되진 않았지만 잉글랜드는 이 작전으로 몇 차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8강 진출이란 소기의 성과를 얻은 호지슨 감독의 실용주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한다.

반면 이탈리아는 잉글랜드와 달랐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상대방을 지켜보면서 뛰었다. 중앙이 막히면 측면으로, 뒤쪽 공간이 생기면 기습적인 로빙 패스로 다양하게 찔렀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이날 유독 중거리 슛을 자주 시도했다. 경기 후 이유가 밝혀졌다.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은 “잉글랜드가 뒤로 물러날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시종일관 ‘파닥거린’ 잉글랜드에 비해 이탈리아는 요령이 돋보였다. 후반 40분경 이탈리아 축구의 경험이 입증되었다. ‘원 사이드 게임’이 득점 없이 후반 40분이라면 당연히 경기를 주도한 쪽이 더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뭔가 손해를 봤다는 심리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달랐다. 오히려 수비 진영에서 볼을 돌리면서 템포를 조절했다. 템포가 올라가면 역습을 노리는 잉글랜드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에A 특유의 전술 축구가 빛난 대목이었다.

경기 후 양 감독의 기자회견에서도 다루어졌듯이 이날 두 팀의 클래스 차이를 보여준 단적인 예가 바로 안드레아 피를로의 승부차기 킥이었다. 피를로는 세 번째 키커로 나섰다. 두 번째 키커였던 리카르도 몬톨리보가 실축했고, 루니가 장쾌한 킥을 성공시킨 직후였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피를로는 정중앙을 향해 살짝 찍어 찼다. 볼은 느리게 살짝 떴다가 상대 골키퍼가 자리를 비운 공간으로 천천히 날아 들어갔다. ‘파넨카’라는 속칭으로 불리는 페널티킥이었다.

호지슨 감독은 “피를로의 칩슛은 연습을 통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라며 절찬했다. 승장 프란델리 감독도 “피를로야말로 진정한 스타플레이어다. 어떻게 차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렇게 찼다”라며 팀의 기둥에게 박수를 보냈다. 경기 중에도 환상적인 패스를 연발했던 피를로는 이날 ‘맨 오브 더 매치’로 선정되었다. 트로피 수여식에서 피를로의 선정 이유에 대해 프랑스 출신의 크리스티앙 카랑뵈는 “아주 쉬운 결정”이라고 대답했다.

패퇴한 잉글랜드는 두 가지 긍정적 부분을 찾았다. 우선 대회 성적 자체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았던 덕분에 자국 언론의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프랭크 램파드와 가레스 베리 등 주축이 모두 부상 이탈했다. 감독 선임도 늦었다. 호성적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위기 속에서 이룬 8강 진출이 오히려 환영 받는 분위기다. 또 이번 대회를 통해 대니 웰벡, 알렉스 옥슬레이드-채임벌린 등 젊은 선수들의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질병인 ‘직선적 축구’는 고쳐지지 않았다. 무작정 차고 뛰었다. 워낙 힘이 좋아 약팀을 상대로는 여전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처럼 정상급 팀 앞에선 한없이 촌스러워진다. 제라드가 정신력으로 팀을 지탱했지만, 거기까지 한계라는 사실을 우아한 피를로와 영리한 이탈리아가 가르쳐준 8강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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