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우리 국민은 월드컵 4강 진출을 고대하고 있다. 한국축구는 때때로 실망시킨 적도 있지만, 국민의 축구고, 국민을 위한 축구였기에 축구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은 한결같이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1954년 제5회 월드컵 이후 36년만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한국은 1990년 이탈리아,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에는 월드컵개최국이면서 5회 연속 출전국이 되었고, 2006년, 2010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하여 8회 연속 출전국이 되었다.
1954년 제5회 스위스월드컵대회에 출전한 한국팀 20명 출전 선수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박재승(朴在昇)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재승씨는 유난히 축구를 좋아하여, 중국에 사는 동안에도 축구팀에 들어가 공을 찼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월남하여 조선전업(현 한국전력)에 입사, 본격적인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6.25사변으로 인하여 그는 군에 입대, 중국어 통역장교로 임관되어 군 생활을 하면서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다.
당시 정보국에서 7사단에 파견근무를 하면서, 사기진작의 일환으로 축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워낙 축구에 대한 열정과 소질이 있었던 그는 7사단 팀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그의 출신이나 나이 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괴팍한 인물로 비하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 그는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료로 부터도 모호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한국이 출전한 첫 월드컵인 제5회 스위스대회에 출전했을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32세라면 노장 소리를 듣거나 은퇴할 연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40세 가까운 연령까지 선수생활을 계속 할 만큼 강한 체력이었고, 축구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도 늦어질 수밖에 없어, 선수생활은 노총각 생활이었다.
1956년 9월6일 홍콩에서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그는 36세 나이로 한국대표팀 주장으로 출전했다. 현재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 선수 중 생존자로는 박재승, 김영진, 그리고 필자인 박경호 등 3명뿐이다.
그는 제1회 홍콩 아시아 선수권대회에는 선수, 2회 서울대회(효창운동장)에서는 트레이너(당시코치)로 출전하여 모두 우승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한국은 그 후 아시아의 축구강국이라고는 하나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청소년대표 감독으로 제5회 대회 우승 등, 지도자로서, 행정가로서 축구협회 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지금 90이 넘은 고령으로 외롭게 병상에서 고전하고 있다. 나는 그가 항상 말하는 말 중에 “공은 둥글기 때문에 축구인은 항상 둥글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글쓴이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1958년 대표선수로 활약했으며 제1회아시안컵 우승 멤버다. 1969년 모교인 경희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한양공고 건국대 육사 서울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일본 오이타 클럽 기술고문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1954년 제5회 월드컵 이후 36년만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한국은 1990년 이탈리아,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에는 월드컵개최국이면서 5회 연속 출전국이 되었고, 2006년, 2010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하여 8회 연속 출전국이 되었다.
1954년 제5회 스위스월드컵대회에 출전한 한국팀 20명 출전 선수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박재승(朴在昇)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재승씨는 유난히 축구를 좋아하여, 중국에 사는 동안에도 축구팀에 들어가 공을 찼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월남하여 조선전업(현 한국전력)에 입사, 본격적인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6.25사변으로 인하여 그는 군에 입대, 중국어 통역장교로 임관되어 군 생활을 하면서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다.
당시 정보국에서 7사단에 파견근무를 하면서, 사기진작의 일환으로 축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워낙 축구에 대한 열정과 소질이 있었던 그는 7사단 팀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그의 출신이나 나이 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괴팍한 인물로 비하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 그는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료로 부터도 모호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한국이 출전한 첫 월드컵인 제5회 스위스대회에 출전했을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32세라면 노장 소리를 듣거나 은퇴할 연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40세 가까운 연령까지 선수생활을 계속 할 만큼 강한 체력이었고, 축구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도 늦어질 수밖에 없어, 선수생활은 노총각 생활이었다.
1956년 9월6일 홍콩에서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그는 36세 나이로 한국대표팀 주장으로 출전했다. 현재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 선수 중 생존자로는 박재승, 김영진, 그리고 필자인 박경호 등 3명뿐이다.
그는 제1회 홍콩 아시아 선수권대회에는 선수, 2회 서울대회(효창운동장)에서는 트레이너(당시코치)로 출전하여 모두 우승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한국은 그 후 아시아의 축구강국이라고는 하나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청소년대표 감독으로 제5회 대회 우승 등, 지도자로서, 행정가로서 축구협회 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지금 90이 넘은 고령으로 외롭게 병상에서 고전하고 있다. 나는 그가 항상 말하는 말 중에 “공은 둥글기 때문에 축구인은 항상 둥글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글쓴이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1958년 대표선수로 활약했으며 제1회아시안컵 우승 멤버다. 1969년 모교인 경희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한양공고 건국대 육사 서울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일본 오이타 클럽 기술고문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