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척척박사] 2-26. 공주 공산성을 돌아보며
입력 : 2024.03.2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타뉴스 | 채준 기자]
백제금동향로 모사품의 일부 /사진제공=pixabay
백제금동향로 모사품의 일부 /사진제공=pixabay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가와 민족은 주역으로 등장했다 사라지고, 또 그 명맥을 이어가길 반복하였다.

우리 한국의 역사, 이 땅에서도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성립된 수많은 소국들이 백제, 신라, 고구려 3국에 더하여 가야로 정립되었으며, 그 속에서 한국문화의 기반이 되는 고대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 중 백제는 치열한 영욕의 역사 속에서도 백제의 미학으로 일컬어지는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절제미를 이루어 냈으니 그 문화 역량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현장으로서 백제와 운명을 같이 했던 곳이 있으니, 바로 백제의 왕성 중 하나였던 공산성이다. 이 글에서는 백제의 문화가 꽃 피워 낸 현장, 지금은 세계적인 유적지가 되어 있는 공산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잘 아다시피, 백제는 한국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기원전 18년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약 60여 년(475~538),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여 약 120여 년(538~660년)을 영위하는 등 두 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백제의 시작은 한강유역에 위치한 마한의 하나인 '십제'로서 북쪽에서 내려온 부여씨 일족이 세운 소국이었다. 점차 주변국들을 병합하며 성장하여 3세기 무렵 고이왕(재위 234~286년) 대에는 관등제도와 법률을 정비하여 중앙 집권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은 남으로는 마한의 최강국인 목지국을 정복하는 등 마한을 병합하고, 북으로는 황해도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또 백제는 일본에 아직기, 왕인박사 등의 학자를 보내 일본 고대문화인 아스카(飛鳥)문화의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475년에는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재위 455~475년)이 피살되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500년 도읍지 한성을 뒤로하고 급히 남천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결국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재위 475~477년)은 한성을 버리고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 때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겨 자리잡은 왕성이 지금의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금강을 끼고 있으며, 이를 품은 웅진은 서해의 뱃길로 이어지는 금강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공산성은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과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산성으로, 성벽의 둘레는 약 2.7km, 동서 약 800m, 남북 약 400m이며 현재도 성벽이 잘 남아 있다.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과 북문인 공북루/사진제공=백제세계유산센터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과 북문인 공북루/사진제공=백제세계유산센터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도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성 안에는 백제 당시의 왕궁 건물지, 생활유적들과 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1980년대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성의 축조기법과 성안의 다양한 유적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성곽 축조는 한성기부터 이어온 흙과 모래를 번갈아 쌓아 다져서 성벽을 만드는 판축기법이 사용되었다. 또 바닥을 도랑처럼 파고,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고운 흙으로 벽을 발라 두껍게 만드는 벽주건물지가 남아있는데, 이는 고대 중국과 일본에도 보이는 전통이다. 이는 당시 중국의 기술을 수용하여 백제의 토목건축 기술로 발전시켜, 다시 일본으로 전파시킨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이다.

웅진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의 뒤를 이어 동성왕(재위 475~501년)과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귀족세력을 재편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중국 남조와도 활발하게 교류하며 선진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갱위강국을 선포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하며 중흥의 초석을 다졌다.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재위 523~554년)은 무령왕의 장례를 성대히 모셨는데, 이는 공주 무령왕릉과 그 안에서 출토된 지석, 금제관식 등 5천여 점의 유물에 그 모습이 여실히 담겨 있다. 또 성왕은 공주에 대통사를 창건하였으며, 538년에는, 백제의 보다 큰 융성을 위하여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도읍을 옮기었다. 한편으로 중국의 장인을 초빙하여 신기술을 수용하고, 일본에 불교와 기술전문가를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전수하는 등 국제적인 교류와 함께 백제 중흥의 가도를 달렸으나, 신라와의 전쟁 중 관산성(충북 옥천지방)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은 백제의 내실을 다지는 데 진력하였다. 부여 왕흥사, 능산리 사지 등이 이때 건립된 것이다. 이후 무왕(재위 600~641년)은 왕권 강화하며, 현재의 익산인 지모밀지에 왕궁과 미륵의 용화 세계를 구현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660년, 백제는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웅진성으로 피난한 의자왕이 당에 붙잡히고, 사비(부여)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어 3년에 걸쳐 치열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내분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국가의 명운을 다하였다.

공산성 서쪽성벽과 서문인 금서루 /사진제공=백제세계유산센터
공산성 서쪽성벽과 서문인 금서루 /사진제공=백제세계유산센터


다시, 공주의 웅진성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전개해 보면, 사비천도 이후에도 웅진성은 백제의 중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사비에서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당시 웅진성주였던 예식진의 배신으로 당나라에 끌려간 현장이 이곳이다. 백제 멸망 이후, 당(唐)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군사령부 역할을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熊川州)가 설치되었으며, 통일신라 말,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거점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충청감영을 공주에 두어 성 내부에 감영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조선 중기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잠시 머물기도 한 역사적인 장소였다.

일제강점기에 공산성은 공원으로 변하여 현대에도 한동안 산성공원이라 불렸고, 금강에 인접한 공북루 쪽에 마을도 생겨 주민들이 거주하였다. 산허리를 두른 차량 운행이 가능한 산복 길도 만들어졌다. 현재는 마을을 철거하고 전면 발굴조사하여 백제 당시의 유적지로 정비되어 있는 상태이다.

돌이켜 보면, 백제의 문화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었다. 고구려·신라와 함께 한국 고대문화의 핵심으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다시 수준 높은 문화로 재창출하였다. 이를 다시 주변국들에게 전파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백제'라는 나라는 없어졌지만, 우리의 문화 저변에 흐르는 검이불루 화이불치,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절제의 미학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 역사 속에서 살아 있다. 백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맥을 타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 문화의 정신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공산성은 웅진시기(475~538년)에 축조된 왕성이자 방어성으로 웅진성(熊津城)이라 불렸고 백제 이후에도 중요한 거점으로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후기의 왕성으로서, 동아시아 문명교류의 핵심 유적의 하나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은 이제 인류가 함께 인정하고, 지켜야 할 세계적인 문화자원이 되었다.

백제가 자리했던 특히 그 왕도지역에 남겨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공주의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부여왕릉원', 그리고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등 <백제역사유적지구> 8개 유적의 하나로서, 백제문화의 상징이며, 백제의 문화 역량을 담고 있는 문화자원의 보고이며, 새로운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백제는 사라졌으나 그 문화의 생명은 영속성을 띠고 확대 재산상 중이다. 이러한 문화를 간직하고, 가꾸어 키워나가고, 창조의 자원으로서 활용해 온 것이 우리 선조들과 선배들과 우리들이 해 온 역할이며, 앞으로 후배들과 함께할 사명이기도 하다. 유산이 말그대로 과거의 것으로 넘을 것인지, 아니면 미래의 위대한 자원이 될 것인지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는 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이귀영 백제세계유산센터 센터장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행정척척박사] 2-26. 공주 공산성을 돌아보며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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