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축구계를 경악하게 한 ‘괴물’ 엘링 홀란(23·맨체스터 시티)은 아니었다. 비록 리그 수준은 떨어질지라도 여전히 빼어난 득점력을 과시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8·알나스르)는 더욱 아니었다. 당대 으뜸을 다투는 두 걸출한 골잡이 모두 맨 윗자리를 양보(?)하고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홀란과 호날두를 굽어본 골잡이는 로멜루 루카쿠(30·AS 로마)였다.
루카쿠는 ‘불운한 걸물’이다. 대형 스트라이커의 자질을 갖췄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좀처럼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2010년대엔, ‘신계의 두 사나이’ 리오넬 메시(36·인터 마이애미 CF)와 호날두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2020년대에 들어서선, 당대를 주름잡는 두 신성 킬리안 음바페(25·파리 생제르맹)와 홀란의 그물에 갇혀 움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카쿠는 쓰러짐을 거부했다. 간간이 축구 기록사에 이름을 올리며 부도옹의 뚝심을 보이곤 했다. UEFA(유럽축구연맹) 네이션스리그 2020-2021시즌 득점왕은 그 대표적 보기다. 2018 러시아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브론즈 부트(득점 3위)도 안았을 만치 정상은 아닐지라도 꾸준히 득점력을 발휘하며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탈리아 세리에 A 2020-2021시즌,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 밀란)를 정상으로 이끌고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루카쿠가 다시 한번 금자탑을 쌓았다. 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월드 베스트 인터내셔널 골 스코어러 2023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루카쿠(22골)였다. 3년 전, 이 부문 2020 득점왕(16골)의 감격을 누렸던 달콤한 추억에 다시금 잠겼다.
지난해 세계 축구 득점사를 수놓았던 두 빼어난 골잡이인 호날두도 해리 케인(30·바이에른 뮌헨)도 국제 경기 득점 부문에서만큼은 루카쿠에 미치지 못했다. 2023년, 호날두는 모든 대회를 망라해 최다 득점(54골) 부문 정상을 밟았고, 케인은 톱 디비전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38)을 수확하며 이름값을 높인 바 있다.
루카쿠는 큰물에서 강함을 스스로 입증했다. 리그에서 다 쏟아 내지 못한 역량을 국제 경기에서 맘껏 분출했다. 그 결과의 산물이 곧 2023년 전 세계 국제 경기 득점왕 등극이다.
세리에 A 2022-2023시즌, 인터 밀란에 둥지를 틀고 있던 루카쿠는 가까스로 두 자릿수 득점(10골)에 턱걸이하는 데 그쳤다. 당연히 득점 레이스 10위 안에도 끼지 못했다. AS 로마로 임대돼 뛰고 있는 2023-2024시즌엔, 다소 페이스가 좋아져 8골(4일 현재·현지 시각)로 3위를 달린다. 어쨌든 지닌 역량을 다 보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무대를 바꾸면 180°반전된 모양새가 연출된다. 지난 한 해 동안 국제 경기에서, 루카쿠는 펄펄 날았다. 국제 클럽 대항전에서 7골을, 국가대표팀(벨기에)으로 치른 A매치에서 15골을 각각 터뜨렸다(표 참조). 총 22골을 쓸어 담음으로써, 각종 득점 기록을 양산하는 홀란의 기세마저 무너뜨렸다.
루카쿠가 폭발한 잠재력 앞에서, 홀란은 숨을 죽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22-2023시즌, 맨체스터 시티 우승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며 득점왕(12골)에 올랐건만, A매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유럽 축구의 변방인 노르웨이의 근원적 한계엔, 홀란도 어쩔 도리 없었다. 그 격차도 네 걸음이나 됐다.
홀란뿐만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골잡이들 모두 희생양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음바페, 호날두, 케인 모두 4위(13골)에 그쳤다.
이색적 부분은 아시아인이 한 명 상위 5걸 안에 얼굴을 내밀었다는 점이다. 이란이 자랑하는 스트라이커인 메흐디 타레미(31·포르투)가 3명의 뛰어난 세계적 골잡이를 - 음바페, 호날두, 케인 – 제치고 3위(14골)에 자리했다는 점이 뚜렷하게 눈에 띈다.
세상사는 돌고 돈다. 승부의 세계에서, 영원한 절대 강자는 존재할 수 없다. 또, 어느 누가 잠재력을 한껏 내쏟고 루카쿠처럼 돌출돼 나올지 알 수 없는 세계 축구계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