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뉴스 | 채준 기자]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이 지난 2월12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5개월여간의전시회를 마쳤다.
전시 기간동안 2번이나 덕수궁을 찾아가 관람했다. 어린이, 가족, 새·까치 등을 소재로 한 한국적인 멋을 그림에 담은 대표적인 2세대 서양화가인 정욱진의 작품 보다는 그가 체육 특기생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전시회를 소개하는 그의 작품집 연표에 '1936년 양정고등보통학교(현 양정고)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육상선수(높이뛰기)와 빙상선수로 활약'했다고 올라있었다. 맨 뒤 작품집 출처에 동아일보 1936년 5월14일자 '육상양정의 교내 럭비와 육상 경과'와 같은 신문 1936년 6월9일자 '신흥(新興)의 일고육상진(一高陸上陣 중등육상(中等陸上) 상승(常勝)의 양(養)'이라는 제목의 두 기사가 표시돼 있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을 통해 두 기사를 직접 찾아보았다. 앞 기사는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양정고보 교내운동회 육상과 럭비에서 4학년부가 우승을 차지했다'며 '주고도(높이뛰기)'에서 3학년생 장욱진이 1m50을 뛰어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뒷 기사는 '경성육상연맹주최의 제5회 경성남자중등학교 각학년별 대항육상경기대회가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양정 등 12개 학교가 참가해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가 육상 상승의 양정고보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장욱진은 육상 800m 릴레이 1부에서 이강, 열, 문수완 등과 함께 1부42초2로 보성고보(1분44초)를 제치고 우승을 했다고 덧붙였다.
두 기사 이외에 또 다른 기사들도 검색됐다. 동아일보 1934년 9월25일 '연전 주최 전조선중등학교 육상경기' 기사에서 장욱진은 주고도 결승에서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 재학생으로 3등을 했다고 전했다. 장욱진의 운동 기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선일보 1939년 1월23일자 '고전(高專)과 중등(中等)피규어 대학 최 양정 김우승(大學崔養正金優勝)' 제목의 기사에서 장욱진은 중등부 피겨부문에서 7.5점으로 6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겨울철 종목인 피겨스케이팅에서도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장욱진이 체육특기자가 된 까닭
그의 생전 사진이나 자화상 그림을 보면 호리호리한 체격에 운동신경도 뛰어났을 것으로 보였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을 배출한 육상 명문 양정고보 체육 특기생이라는 점이 매우 이채로웠다. 장욱진 화백이 체육 특기생이 된 것은 특별한 당시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장욱진 화백은 1917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윈 그는 고향에서 서울로 옮겨왔다. 경성사범 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할 즈음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보통학교(초등학교) 3학년때인 1926년 전국어린이 미술대회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당시 일본 식민지였기에 그 때의 전국이라는 말은 일본과 한반도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최고상을 받은 그림은 일본인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그린 그의 그림을 출품한 것이었다.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에 들어간 장욱진 화백은 특별 활동시간에 미술반에서 그림을 열심히 그린 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일본인 선생님이 한국 사람을 깔보는 처사를 보고 심하게 항의하다가 그만 퇴학을 당했다.
당시 퇴학당한 학생은 서울 시내에서 전입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체육 특기생은 예외였다. 운동도 잘 하는 장욱진 화백은 체육 특기생으로 양정보고 3학년생으로 편입할 수 있게됐던 것이다. 양정보고에 들어간 뒤 전국 학생체육대회에 육상과 빙상 선수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체육과 함께 미술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1938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그림 대회에서 '공기놀이'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일로 장욱진은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하고 1939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장욱진 화백 시대와 현재 체육특기자는 어떻게 다를까
체육특기자는 체육 분야에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학생을 말한다. 학교체육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체육은 단순한 교과목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체육특기자제는 시대적인 교육상황에 따라 실제적인 운영방법에서 많이 차이가 난다. 장욱진 화백이 교육을 받던 일제강점기와 현재의 체육특기자제가 크게 다른 이유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3년 본격적인 체육특기자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학교체육은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이 서로 연계돼 운영됐다. '운동 선수'도 정상적인 공부를 하면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욱진 화백과 같이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학생도 운동 능력이 좋으면 선수로 뛸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상백 선생은 와세다대학 시절, 일본 대학농구대표로 활약한 뒤 해방이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경성고보, 와세대 출신의 한국배구 개척자 박계조 선생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대학배구 대표선수로 활동했으며, 해방이후 대한배구협회 탄생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축구 김용식 선생은 와세다 대학을 거쳐 1936년 베를린올림픽서 일본 국가대표로 뛰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 가운데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이들이 많다. 농구 김영기(배재고 출신), 방열(경복고 출신), 배구 임형빈(경기고 출신) 선생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체육특기자제는 1973년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운동선수들에게 병역특례(체육요원 복무)를 주는 병역법이 최초로 시행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운동선수들은 학습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고도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국제무대에서 국가위상을 높일 경우 병역 특례 해택까지 받게된 것이다. 체육특기자제는 우리나라 체육의 명암을 보여주는 제도가 됐다. 체육특기자제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개선, 변화돼 왔지만 아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 체육특기자,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우리 사회에는 '체육특기생이라면 운동을 독보적으로 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체육특기자 준비생들이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이들은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 수업 받을 권리를 포기하게 된다. 실제로 체육특기자 준비생의 대부분은 학교 정규수업에 정상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체육특기생이 수업권을 포기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의 평가방식은 ▲수상실적이 입시의 당락을 결정한다는 점 ▲학생부성적과 수능성적을 소극적으로 반영하는 점 ▲면접반영비율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우선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지원자의 수상실적이었다. 일례로 모 대학의 체육특기자 전형의 지원자격 요건은 '최근 3년 내 전국대회에서 3위 내 입상'이었다. 수상실적이라는 높은 관문으로 인해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 나머지 평가요소들은 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학생부성적이나 수능성적 등 학업성적의 실질 반영비율은 낮다. 이러한 평가방식 하에서 체육특기자 준비생들은 운동이 아닌 학업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체육특기자 전형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교육부 등 기관에서는 저마다 정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정책들은 입시제도 평가기준을 개선하는 것보다 수업권 포기를 막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시제도의 개편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는 수상실적이 여전히 큰 평가요소이기에 강제적으로 대회 참가를 제한하고 출결을 관리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정작 바뀌어야 할 입시제도 개편에 관해서는 관련 기관의 협의가 부족한 상황이다. 지금까지도 정책시행에 필요한 구체적 계획이 미비한 상태다. 체육특기자 제도는 논란이 함께 따라다니는 만큼 개선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정책들은 체육특기자 입시제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 수면 위에 드러난 문제에만 집중하는 미봉책이다. 이런 미봉책은 체육특기자 제도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려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체육특기자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타개책이 마련돼야 한다.
지금과 같은 체육특기자 제도 안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장욱진 화백 등 공부를 하면서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한 '학생 선수'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꽃 피우기' 만큼이나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백년지대계'라는 교육, 특히 학교체육은 체육특기자제의 올바른 운영을 통해 정상화될수 있다고 본다.
-김학수 CST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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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가옥에서 생전의 장욱진 화백/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제공 |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이 지난 2월12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5개월여간의전시회를 마쳤다.
전시 기간동안 2번이나 덕수궁을 찾아가 관람했다. 어린이, 가족, 새·까치 등을 소재로 한 한국적인 멋을 그림에 담은 대표적인 2세대 서양화가인 정욱진의 작품 보다는 그가 체육 특기생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전시회를 소개하는 그의 작품집 연표에 '1936년 양정고등보통학교(현 양정고)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육상선수(높이뛰기)와 빙상선수로 활약'했다고 올라있었다. 맨 뒤 작품집 출처에 동아일보 1936년 5월14일자 '육상양정의 교내 럭비와 육상 경과'와 같은 신문 1936년 6월9일자 '신흥(新興)의 일고육상진(一高陸上陣 중등육상(中等陸上) 상승(常勝)의 양(養)'이라는 제목의 두 기사가 표시돼 있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을 통해 두 기사를 직접 찾아보았다. 앞 기사는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양정고보 교내운동회 육상과 럭비에서 4학년부가 우승을 차지했다'며 '주고도(높이뛰기)'에서 3학년생 장욱진이 1m50을 뛰어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뒷 기사는 '경성육상연맹주최의 제5회 경성남자중등학교 각학년별 대항육상경기대회가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양정 등 12개 학교가 참가해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가 육상 상승의 양정고보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장욱진은 육상 800m 릴레이 1부에서 이강, 열, 문수완 등과 함께 1부42초2로 보성고보(1분44초)를 제치고 우승을 했다고 덧붙였다.
두 기사 이외에 또 다른 기사들도 검색됐다. 동아일보 1934년 9월25일 '연전 주최 전조선중등학교 육상경기' 기사에서 장욱진은 주고도 결승에서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 재학생으로 3등을 했다고 전했다. 장욱진의 운동 기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선일보 1939년 1월23일자 '고전(高專)과 중등(中等)피규어 대학 최 양정 김우승(大學崔養正金優勝)' 제목의 기사에서 장욱진은 중등부 피겨부문에서 7.5점으로 6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겨울철 종목인 피겨스케이팅에서도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장욱진이 체육특기자가 된 까닭
/사진제공=pixabay |
그의 생전 사진이나 자화상 그림을 보면 호리호리한 체격에 운동신경도 뛰어났을 것으로 보였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을 배출한 육상 명문 양정고보 체육 특기생이라는 점이 매우 이채로웠다. 장욱진 화백이 체육 특기생이 된 것은 특별한 당시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장욱진 화백은 1917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윈 그는 고향에서 서울로 옮겨왔다. 경성사범 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할 즈음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보통학교(초등학교) 3학년때인 1926년 전국어린이 미술대회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당시 일본 식민지였기에 그 때의 전국이라는 말은 일본과 한반도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최고상을 받은 그림은 일본인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그린 그의 그림을 출품한 것이었다.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에 들어간 장욱진 화백은 특별 활동시간에 미술반에서 그림을 열심히 그린 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일본인 선생님이 한국 사람을 깔보는 처사를 보고 심하게 항의하다가 그만 퇴학을 당했다.
당시 퇴학당한 학생은 서울 시내에서 전입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체육 특기생은 예외였다. 운동도 잘 하는 장욱진 화백은 체육 특기생으로 양정보고 3학년생으로 편입할 수 있게됐던 것이다. 양정보고에 들어간 뒤 전국 학생체육대회에 육상과 빙상 선수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체육과 함께 미술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1938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그림 대회에서 '공기놀이'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일로 장욱진은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하고 1939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장욱진 화백 시대와 현재 체육특기자는 어떻게 다를까
/사진제공=pixabay |
체육특기자는 체육 분야에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학생을 말한다. 학교체육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체육은 단순한 교과목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체육특기자제는 시대적인 교육상황에 따라 실제적인 운영방법에서 많이 차이가 난다. 장욱진 화백이 교육을 받던 일제강점기와 현재의 체육특기자제가 크게 다른 이유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3년 본격적인 체육특기자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학교체육은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이 서로 연계돼 운영됐다. '운동 선수'도 정상적인 공부를 하면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욱진 화백과 같이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학생도 운동 능력이 좋으면 선수로 뛸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상백 선생은 와세다대학 시절, 일본 대학농구대표로 활약한 뒤 해방이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경성고보, 와세대 출신의 한국배구 개척자 박계조 선생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대학배구 대표선수로 활동했으며, 해방이후 대한배구협회 탄생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축구 김용식 선생은 와세다 대학을 거쳐 1936년 베를린올림픽서 일본 국가대표로 뛰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 가운데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이들이 많다. 농구 김영기(배재고 출신), 방열(경복고 출신), 배구 임형빈(경기고 출신) 선생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체육특기자제는 1973년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운동선수들에게 병역특례(체육요원 복무)를 주는 병역법이 최초로 시행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운동선수들은 학습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고도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국제무대에서 국가위상을 높일 경우 병역 특례 해택까지 받게된 것이다. 체육특기자제는 우리나라 체육의 명암을 보여주는 제도가 됐다. 체육특기자제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개선, 변화돼 왔지만 아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 체육특기자,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우리 사회에는 '체육특기생이라면 운동을 독보적으로 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체육특기자 준비생들이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이들은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 수업 받을 권리를 포기하게 된다. 실제로 체육특기자 준비생의 대부분은 학교 정규수업에 정상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체육특기생이 수업권을 포기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의 평가방식은 ▲수상실적이 입시의 당락을 결정한다는 점 ▲학생부성적과 수능성적을 소극적으로 반영하는 점 ▲면접반영비율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우선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지원자의 수상실적이었다. 일례로 모 대학의 체육특기자 전형의 지원자격 요건은 '최근 3년 내 전국대회에서 3위 내 입상'이었다. 수상실적이라는 높은 관문으로 인해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 나머지 평가요소들은 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학생부성적이나 수능성적 등 학업성적의 실질 반영비율은 낮다. 이러한 평가방식 하에서 체육특기자 준비생들은 운동이 아닌 학업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체육특기자 전형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교육부 등 기관에서는 저마다 정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정책들은 입시제도 평가기준을 개선하는 것보다 수업권 포기를 막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시제도의 개편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체육특기자 입시제도에서는 수상실적이 여전히 큰 평가요소이기에 강제적으로 대회 참가를 제한하고 출결을 관리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정작 바뀌어야 할 입시제도 개편에 관해서는 관련 기관의 협의가 부족한 상황이다. 지금까지도 정책시행에 필요한 구체적 계획이 미비한 상태다. 체육특기자 제도는 논란이 함께 따라다니는 만큼 개선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정책들은 체육특기자 입시제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 수면 위에 드러난 문제에만 집중하는 미봉책이다. 이런 미봉책은 체육특기자 제도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려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체육특기자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타개책이 마련돼야 한다.
지금과 같은 체육특기자 제도 안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장욱진 화백 등 공부를 하면서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한 '학생 선수'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꽃 피우기' 만큼이나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백년지대계'라는 교육, 특히 학교체육은 체육특기자제의 올바른 운영을 통해 정상화될수 있다고 본다.
-김학수 CST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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