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의 축구話] EPL을 통해 본 축구의 이중잣대
입력 : 2012.01.13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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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인문학에서 ‘토끼-오리’ 그림이 쓰인다. 똑같은 그림을 놓고도 사람들의 의견은 토끼와 오리로 갈린다. 착시의 대표적인 사례로도 익숙하다. 갈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중성의 동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우스갯소리도 그런 이중성을 잘 말해준다.

최근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같은 일을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한국시간 12일 새벽 열린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와 리버풀의 칼링컵 준결승전이 최신 버전이다. 리버풀이 1-0 신승을 거둔 이 경기가 끝나고 그라운드 밖에서는 두 가지 논쟁이 벌어졌다. 발단은 리버풀 수비수 글렌 존슨의 태클이었다. 후반 추가시간 존슨은 태클로 맨시티의 패스 연결을 차단했다. 문제는 존슨의 태클이 양쪽 스터드(발바닥 부위)가 보이는 양발 태클(Two-footed tackle)이었다는 점이다. 영국 현지 TV 중계진도 “정말 위험한 태클이었다”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주심은 이를 정당한 수비 행위로 판단해 맨시티의 스로인을 선언했다.

경기 후 맨시티의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은 “콩파니의 태클보다 더 나쁜 태클이었다”라고 격노했다.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64강전에서 맨시티 수비수 뱅상 콩파니는 양발 태클로 인해 일발 퇴장 당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맨시티의 항소를 기각하고 4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확정했다. 주전 센터백이 징계로 인해 나오지 못한 경기에서 졌으니 감독으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다. 맨시티가 보기엔 동일 반칙에 대한 주심의 이중잣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결승골 활약을 펼친 리버풀의 주장 스티븐 제라드는 만치니 감독의 이중잣대를 비난하고 나섰다. 제라드가 걸고 넘어진 것은 만치니 감독의 태도였다. 맨유와의 FA컵 경기에서 만치니 감독은 “상관도 없는 루니가 과장된 제스처로 심판의 콩파니 퇴장 조치를 부추겼다”라고 주장했다. 경기 후 만치니 감독이 존슨의 태클을 걸고 넘어지자 제라드가 이를 맞받아쳤다. 즉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이 루니를 욕했던 것과 뭐가 다른가’라는 게 제라드가 화를 낸 이유였다. 일부 언론 보도처럼 격렬한 충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언쟁이라고 표현하기 충분한 장면이 연출되었다(만치니 감독의 인터뷰 도중 제라드가 끼어든 바람에 언쟁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리버풀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의 인종차별 폭언 논란 부작용도 결국 동일 사안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에서 기인한다. 리버풀이 잉글랜드축구협회의 중징계를 수용함으로써 논란은 표면적으로 일단락되었지만 후폭풍이 여전하다. 리버풀 팬들은 아직도 수아레스가 마녀사냥의 희생자라고 여긴다. 이들은 수아레스 연호나 티셔츠 착용 등으로 자신의 불만을 대변한다. <베스트 플레이어>의 저자 매듀 사이드는 11일 영국 일간지 ‘더 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리버풀 팬들을 ‘나그네쥐(lemming)’에 비유했다. 앞장선 쥐만 무작정 따라가다가 압사 당하기도 하는 나그네쥐는 어리석은 지도자의 위험성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동물이다. 사이드가 비유한 우두머리 나그네쥐는 다름아닌 리버풀의 영웅 케니 달글리시다. 그는 달글리시 감독이 지나친 선수 보호로 여론몰이를 했고, 리버풀 팬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해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반대편에 있는 맨유 팬들은 그야말로 기세 등등이다. 축구계 최상위 집행부가 수아레스에게 중징계를 내린 것은 물론 그 결정이 여론의 지지를 얻은 덕분이다. 프로축구선수연합(PFA)의 수장 고든 테일러까지 잉글랜드축구협회의 결정을 “영국 축구계가 인종차별에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로 평가했을 정도다. 리버풀 팬들의 ‘불쌍한 수아레스 씨’는 맨유 팬들에겐 몰지각한 인종차별자인 동시에 앞으로 영원한 비난해나갈 대상밖에 되지 않는다. 앙숙 리버풀을 비난할 기가 막힌 ‘건수’를 잡은 것이다. 맨유 팬들의 폭력성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영국 내무부 발표에 의하면 2010/2011시즌 맨유 팬 101명에게 축구 경기장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첼시(105명)에 이어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 중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 이들은 지금쯤 아마도 “리버풀 경기에서 무슨 욕을 해주지?”라며 키득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절대 지지를 보낸 곳이 바로 맨유였다. 인종차별은 아니었지만 호날두는 독일에서 소속팀의 잉글랜드 동료를 경기장 밖으로 내쫓는 데 일조한 뒤 그 유명한 윙크를 날렸다. 당시 잉글랜드는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만약 독일에서 호날두가 박지성을 그런 식으로 퇴장시켰다면? 한국 축구 팬들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보면 잉글랜드 축구 팬들의 분노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공공의 적 1호가 된 호날두는 그 이후 가는 곳마다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 그렇지만 맨유 팬들만은 호날두에게 더 큰 박수와 응원을 보냈다. 맨유 팬들은 “어려울수록 응원하는 게 진정한 팬”이라며 가슴을 폈지만 다른 잉글랜드 축구 팬들에겐 모두 배알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보일 뿐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현 상황이 거꾸로 벌어졌다고 해도 상황 추이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존슨이 먼저 퇴장을 당했고 다음 경기에서 콩파니의 양발 태클이 그냥 넘어갔다면 달글리시 감독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존슨을 퇴장시키라고 부추겼다며 발로텔리를 비난한 달글리시 감독이 “왜 콩파니는 퇴장 안 시키는가!”라고 폭발했다면, 맨시티의 반응도 뻔하다. 하비에르 에르난데스가 경기 중 존슨의 피부색을 운운했다면? 별다른 추측 없이 누가 화를 내고, 누가 비난을 받고, 누가 징계를 받을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축구판에서는 입장과 상황에 따른 자기합리화와 이중잣대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진=ⓒMarc Atkins/BPI/스포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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