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척척박사] 2-39. 역사에서 보는 개방과 쇄국의 교훈
입력 : 2024.06.2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타뉴스 | 채준 기자]
백제 무령왕릉 내부 사진.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무덤양식인 전축분을  수용하여  백제적인  미감으로  고분을 축조하였다. 사진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백제 무령왕릉 내부 사진.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무덤양식인 전축분을 수용하여 백제적인 미감으로 고분을 축조하였다. 사진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의 문호를 열고 새로운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인지, 문을 걸어 닫고 고유성을 지킬 것인지, 이에 대한 고심이 늘 있어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쇄국으로 흥한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고대부터 있어 왔으니 그 사례를 살펴볼까 한다.

잘 알다시피, 백제 후기 백제 중흥의 군주로 성왕(聖王, 재위 523~554년)을 꼽는다. 그리고 그 토대를 마련한 왕은, 고구려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든, 그의 아버지 무령왕이다. 우리 귀에 익은 무령왕릉,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당시 삼국 최고 수준의 우수한 문물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백제가 얼마나 중국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는지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장례풍습은 쉽게 바꾸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백제는 벽돌로 만든 중국 묘제인 전축분(塼築墳), 묘지석, 오수전, 석수 등에서 볼 수 있듯 중국의 장례풍습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또 중국 청자 항아리와 병, 등잔 등도 중국에서 직수입한 것들이다. 이들 출토유물에 보이는 요소들이 중국, 특히 남조 양나라 문화와 상당히 닮아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문화 수용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더 주목할 점이 있으니, 백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제작기술과, 디자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도시설계와 건축, 토목공법 등을 백제의 기술, 백제의 정서와 미감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무령왕릉과 왕릉들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백제의 문화수준과 역량이 높았다 것이 중요하다.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의 29호분 출토 벽돌.‘이것(벽돌)을 만든 이는 건업인이다’(造此是 建業人也)란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의 29호분 출토 벽돌.‘이것(벽돌)을 만든 이는 건업인이다’(造此是 建業人也)란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령왕의 붕어 뒤에 즉위한 왕은 그의 아들인 성왕이다. 성왕은 중앙의 관제와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왕권 중심의 국가 운영체제를 정립하고,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는 등 국가를 일신하고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라의 배신으로 다시 잃기는 했으나, 고구려를 남평양까지 밀어붙여 일시적이나마 한강 하류지 역을 회복하기도 하는 등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그의 업적 중에서 주목되는 하나는 백제문화의 질적수준을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수준으로 향상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히 수행하는 한편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하였다.

지금의 장관급인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를 파견하여 불교를 전하고,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파견하여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흔히 백제를 한류문화의 원류라 일컫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 교류와 전파,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성왕에 의해 장례가 진행된 무령왕릉이다. 또 2022년 1월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원에서 공주 무령왕릉 인근 29호분에서 발굴한 중국 남경출신 장인이 만들었다는 글귀가 새겨진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명 벽돌과, 일제 강점기에 6호분에서 나온 남조 양나라 벽돌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또는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로 판독] 등은 이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처럼, 당시 백제의 뛰어난 문화는 적극적인 선진 문명의 수용으로 그 역량을 키워 온 결과물이며, 이를 백제 것으로 발전시켜 일본에 전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백제의 중흥에는 그 주역이었던 성왕과 성왕의 토대를 마련했던 무령왕이 추진했던, 적극적인 대외 교류와 충실한 내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개방과 개혁과 전혀 다른 형태, 즉 국가의 문을 걸어 닫고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쇄국, 해금의 경우가 그러하다.

먼저, 쇄국정책을 살펴보자. 이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 통상 거부 정책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 쇄국정책 하면 떠오르는 것이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대외정책이다.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이양선이 조선 연안에도 자주 출몰하고, 또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빗장을 닫고 단호히 거부하였다. 서양의 중국에 대한 침입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도 조선의 대응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과 맞붙었던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이 조선 곳곳 에 세우게 했던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 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척화비는 이를 잘 보여주는 상징물 이다. 이러한 정책은 일시적으로는 서양열강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결국 세계 정세에 객관적인 인식을 저해했고, 세계사적 대응에서 뒤처지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부산 가덕도 척화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척화 비를 조선 각지에 세워 외세를 경계하였다. 사진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부산 가덕도 척화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척화 비를 조선 각지에 세워 외세를 경계하였다. 사진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다른 국가는 어떠했을까? 중국의 경우 명나라 초 정화의 원정가 끝난 뒤, 명대 초기부터 해금정책으로 전환되어 청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국가의 부가 다른 나라도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국력을 보존하고, 원의 지지세력과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교역은 방해 없이 지속되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해상 사무역과 연안 정착을 금지하는 고립주의 정책은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아, 16세기에는 해적과 밀무역이 만연하였고, 피해를 본 쪽은 생업이나 터전을 잃은 중국인들이 대다수였다 한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온 것이다.
19세기 말 청이 무너지고 중국이 유럽에 유린당한 것도 해금정책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21세기 오늘날의 세계는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폭넓게 열려 있다. 대부분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하나에도 인공지능과 가상의 세계가 가미되고, 정보의 홍수로 넘쳐나고 있다. 이를 대하는 우리 개인, 사회, 지역과 국가도 이러한 흐름에 무관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역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열고 나아가라고. 세계의 흐름과 트랜드에 편승하고 앞서 나가는 길이 우리
를 중흥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귀영 백제세계유산센터 센터장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행정척척박사] 2-39. 역사에서 보는 개방과 쇄국의 교훈



채준 기자 cow75@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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